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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총과 펜과 혀보다 중요한 표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총은 펜(pen)보다 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발전 초기엔 총이 펜보다 위대하기도 하다. 적잖은 학자들은 국가를 살린 쿠데타로 4개를 꼽는다. 터키 케말 파샤, 페루 벨라스코, 일본 메이지유신 그리고 한국 박정희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많은 펜이 도전하고 항거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을 가난에서 구제한 건 펜이 아니라 총이었다.



 산업화가 달성되자 총은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 총이 사라진 곳에서 펜이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1987년 박종철의 죽음이 민주화 불꽃을 댕겼다. 이 죽음을 세상에 알린 건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였다. 건강하고 선도적인 펜은 공동체의 지평을 넓혀준다. 대표적인 펜이 조갑제 기자다. ‘독재자 박정희’만 기억하던 국민에게 그는 ‘혁명가 박정희’를 보여주었다. 그가 쓴 박정희 전기 13권은 성인이 되는 자녀에게 줄 만한 가장 실존적인 선물이다.



 총이나 펜만큼이나 인류 역사를 이끈 게 혀다. 애국적인 지도자의 위대한 혀는 국가를 살리고 거악(巨惡)을 물리친다. 나치 독일군이 유럽을 유린하던 1940년 5월 영국의 처칠은 하원에서 총리 취임 연설을 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프랑스 국방차관 드골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BBC 라디오를 통해 드골은 조국의 국민에서 항전(抗戰)을 호소했다. “우리는 한번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닙니다.”



 힘있는 혀로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지도자가 레이건이다. 1980년대 그는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린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로 소련을 압박했다. 미사일 경쟁에서도 밀렸지만 소련은 혀의 전쟁에서도 졌다. 83년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심장이며 악의 제국”이라고 규탄했다. 87년 6월 그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다. 그러곤 외쳤다. “고르바초프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 장벽은 1년5개월 후 무너졌다. 장벽과 함께 유럽 공산제국도 사라졌다.



 많은 나라에서 총과 펜과 혀가 역사를 바꿔왔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에서 표만큼 강력한 건 없다. 총과 펜과 혀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표만큼 즉각적이고 구체적이지는 않다. 일단 투표로 정해지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아무리 힘센 총과 펜과 혀라도 결과를 뒤집을 순 없다.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현실이 되어 국민 앞에 우뚝 서 있다.



 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는 특히 표가 역사를 만들어 왔다. 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야당 득표율이 여당보다 1.1% 앞섰다. 국민의 저항이 시작됐고 박정희 정권은 흔들렸다. 85년 2·12 총선은 5공 독재정권을 강타했다. 이 선거가 사실상 한국 민주화의 도화선이다.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집권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기록했다. 이 선거로 진보정권은 서서히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이제 이틀 후면 한국의 유권자는 또다시 표를 쥐게 된다.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라 안팎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19대 국회 4년 안에 북한에선 급변사태가 터질 가능성이 크다. 남한에선 포퓰리즘과 양극화, 그리고 이념 갈등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분단 67년 만에 한반도의 유동지수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향후 수년 안에 한반도 진로는 큰 방향을 잡을 것이다.



 많은 게 유권자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영덕 대게 밥상에 둘러앉아 권력잔치를 벌였던 한줌 세력, 자유무역협정·해군기지·측근비리를 없던 걸로 하는 지우개 세력, 독재세습 북한을 옹호하고 천안함 폭침은 부정하는 종북 세력,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막말 돼지까지…어지러운 세력, 어지러운 후보들이 춤을 추며 표를 유혹한다.



 총과 펜과 혀보다 중요한 표. 화약은 없지만 총보다 강하고, 부드럽지만 펜보다 날카로우며, 종잇조각이지만 혀보다 무거운, 그런 표가 다시 한국인 앞에 놓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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