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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퇴짜논 콧대높은 골프클럽, 어딘가보니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집요함으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을 만든 클리퍼드 로버츠. 그는 ‘골프의 성인’이라 불리는 보비 존스와 함께 골프 낙원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Getty Images/멀티비츠]


마스터스 골프대회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은 골퍼에게 최고의 선망 대상이다. 마스터스는 선수들이 가장 나가고 싶어하는 대회이고 우승자에게 주는 그린 재킷은 최상의 영예다. 미국 골퍼들은 마스터스 관람 티켓이라면 자신의 1년 라운드권과도 바꾸겠다고 한다. 이 클럽은 세상에서 가장 자존심 센 집단으로 꼽힌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입회가 거절됐다. 클럽 회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클럽 내부의 일을 말할 수 없다. 클럽 회원이 누구인지도 공개되지 않는다. 1990년 흑인을 받긴 했으나 아직도 여성은 회원으로 받지 않는다. 여성단체가 이에 항의하며 마스터스 중계방송 광고 불매운동을 벌였지만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방송사에 중계권을 공짜로 주면서 버텨 이겼다.

골프광 클린턴 퇴짜놓은 오거스타, 초기엔 미분양 굴욕
고난 이겨내고 만든 ‘마스터스’ 영광



 전통과 권위에 빛나는 이 골프 클럽도 시작은 미약했다. 이곳에서 열리는 마스터스도 출발이 궁상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오거스타와 마스터스의 역사책 안에는 외롭고 집요했던 한 사내의 분투와 고집, 좌절과 성공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골프의 성인’ 보비 존스를 끌어들이다



마스터스 대회가 열리는 미국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16번 홀. 오거스타는 여성 회원은 받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1만6000여 개의 골프장 가운데 여전히 25개 정도가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P=연합뉴스]
 1977년 9월 27일 오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파3 코스의 아이젠하워 연못에서 한 노인의 주검이 발견됐다. 그는 ‘오거스타의 제왕’으로 불리던 이 클럽의 회장 클리퍼드 로버츠(당시 83세)였다.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 냈다.



 클럽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츠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목숨을 끊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병이 깊은 그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언덕을 넘어 아이젠하워 호수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누군가 차나 카트로 그곳에 데려다 줬을 거라는 얘기다. 그는 전날 빳빳한 100달러 지폐를 몇 개 구해놨는데 이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데려다 준 일꾼에게 수고비로 줬을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했다.



 로버츠는 1894년 아이오와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명랑한 성격이었지만 너무 자주 이사를 다녀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갑자기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곤 했다. 너무 잦은 이사에 로버츠의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100년 전 이사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이사를 세 번 하는 것은 집에 불이 나는 것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진짜 불도 났다. 1910년 로버츠는 램프를 켜다가 불을 냈다. 모든 게 불타 버렸다. 물론 보험도 없었다. 이 화재 사건 이후 열여섯 살 로버츠는 어른이 됐다. 그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가족에게 약속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었다. 3년 후 어머니가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고된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아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시련을 견뎌 진정한 남자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한 로버츠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골프의 성인’ 보비 존스를 우연히 알게 됐다. 존스는 팬들의 등쌀에 편하게 골프를 즐길 수 없었다. 둘은 소수의 사람들이 편하게 골프를 하고 쉴 수 있는 골프 낙원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로버츠는 존스와 함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을 만들었다. 회원 1800명을 모아 가입비 350달러, 연회비 60달러를 받아 운영할 계획을 짰다. 하지만 1930년대 초 미국은 대공황으로 경제가 무척 어려웠다. 2개의 골프코스, 테니스 코트, 호텔, 클럽하우스를 지으려던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회원을 모으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했다. 골프장 근처 호텔의 방문객 명단을 얻어 가입 권유 편지를 보냈다. 유명 클럽 회원들과 은퇴자 골프 동호인 모임에도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답장은 거의 없었다. 이듬해 말까지 회원은 66명에 불과했다.



 클럽은 재력가 두 명에게 2만5000달러를 연 6%의 이자로 5년간 빌렸는데 결국 갚지 못했다. 1933년 로버츠는 존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날씨가 좋으면 그린피로 골프장 노동자의 인건비를 댈 수 있지만 비가 오면 수입은 0이다. 클럽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골프장 설계자인 앨리스터 매켄지에게도 돈을 거의 못 줬다. 당대 최고의 골프장 디자이너였던 매켄지는 설계료를 1만 달러에서 절반으로 깎아줬는데 2000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매켄지는 클럽에 긴급 전보를 보내 돈을 독촉하기도 했고 ‘집이 차압 당할 위기이니 돈을 보내달라’ ‘아내가 수술을 했는데 돈이 없으니 제발 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썼다. 그러나 오거스타 내셔널은 그에게 줄 돈이 없었다. 로버츠는 매켄지에게 1000달러짜리 어음을 발행해줬다. 그러면서 “(우리의 재정 상황을 잘 아는) 오거스타에서는 절대 할인이 되지 않을 테니 다른 지역에서 하라”고 일러줬다. 매켄지는 조지아주에서 아주 먼 캘리포니아 은행에서 어음을 할인해 460달러를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의자 66개 빌려와 첫 대회



 오거스타 내셔널에 유일한 탈출구는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대회를 열어야 지명도를 높여 회원을 늘릴 수 있었다. 1933년 2월 개장 직후 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미국골프협회(USGA) 토너먼트 담당 의장인 프레스콧 부시를 초청한 것이다. 프레스콧 부시는 US오픈 개최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여덟 살이었던 그의 둘째 아들 조지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조지 부시)이 된다. 오거스타 내셔널은 “프레스콧 부시가 1934년 US오픈을 오거스타에서 열자고 제안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는 부시의 제안이 아니라 로버츠의 간절한 청탁이었다.



 로버츠는 대회를 개최하면 회원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USGA가 코스 개선을 위해 돈을 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얼마 후 클럽은 “오랜 숙고 끝에 클럽은 우리의 독자적인 대회를 만드는 것이 훨씬 낫다고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로비에도 불구하고 USGA가 오거스타 내셔널에 US오픈 개최권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더운 날씨 때문에 남부 지방인 오거스타에서 대회를 하려면 4월 초에 해야 했다. 하지만 평소 여름에 여는 US오픈을 봄에 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역 예선을 해야 하는데 인근 골프장이 성수기여서 빌리기가 어려웠다. 또 당시 프로들은 대회 상금으로만 먹고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다들 골프장 관리를 맡으면서 부업으로 대회에 참가했는데 봄에는 클럽을 돌봐야 했다.



 로버츠는 존스가 큰 힘이 될 거라고 믿었다. 은퇴했던 수퍼스타 존스가 다시 대회에 참가하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존스는 프로 대회 참가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 골퍼들을 우습게 봤다. “‘정직한 프로’라는 말은 없다”고 할 정도로 아마추어가 우월하다고 여겨, 아마추어로 남은 사람이다. 또 존스는 은퇴한 지 4년이나 지났는데 예전 같은 성적을 못 내면 어쩌나 두려워했다. 로버츠가 설득했다. “좋은 선수들을 초청하고 갤러리들을 모아 클럽을 살리려면 당신이 나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회원들도 골프를 즐기기 가장 좋은 계절에 대회를 치르는 것에 반발했다. 그래서 오전에는 회원들이 치고 오후에 선수들이 경기했다. 마스터스 참가 선수가 다른 대회보다 적은 이유다.



 로버츠는 허리끈을 졸라맸다. 장례식장에서 의자 66개를 빌려왔다. 이전까지 사흘에 끝내던 대회를 나흘로 바꿨다. 티켓을 하루라도 더 팔기 위해서였다.



 마스터스는 초청 대회다. 이렇게 된 것은 초창기 선수들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까 두려워 초청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사실 선수들이 나올 이유가 별로 없었다. 상금은 8명밖에 주지 않았다. 나머지 선수들은 여비를 날리게 된다. 상금이 많지도 않았다. 1등이 1500달러, 8위는 100달러였다. 그 돈도 없어 몇 년간 클럽은 회원들에게 십시일반으로 기부를 받았다. 그렇게 어려웠기 때문에 존스가 선수들에게 꼭 참가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기자들도 대회에 관심이 없었다. 로버츠는 플로리다에서 야구 스프링캠프 트레이닝을 취재하고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야구 기자들에게 “가는 길에 며칠만 들렀다 가라”고 설득했다.



골프 대회와 중계 기틀을 잡은 로버츠



 로버츠는 대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현대 골프 대회의 기본 중 많은 것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대회장에 로프를 둘러친 것도, 방송 중계를 한 것도, 관중석을 만든 것도, 코스에 실시간 스코어보드를 세운 것도, 오버파와 언더파 개념을 만든 것도 그였다. 골프 대회와 중계의 기틀을 잡은 사람이 클리퍼드 로버츠라는 말이다.



 1950년대가 되면서 마스터스는 물질적 고통에서 벗어났다. 로버츠의 열정에 감복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클럽의 막강한 후원자가 됐다. 오거스타 내셔널은 최고의 클럽, 마스터스는 최고의 대회로 거듭났다.



 로버츠는 어린 시절에 대해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정한 시간은 오거스타 내셔널을 만든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의 편집증과 완벽주의는 주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버츠에게 성공과 행복은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는 정착할 만하면 짐을 팔고 장거리 기차에 올라야 하는 잦은 이사와, 화재, 어머니의 자살, 대공황 등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외줄을 타듯 불안한 소년기를 보낸 그에게 성공의 상징인 보비 존스는 완벽한 파트너였다. 클리퍼드 로버츠는 그와 함께 만든 오거스타에서 영원한 성공을 꿈꿨고 그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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