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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독대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사림들이 화(禍)를 입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신무문(神武門)의 변(變)’이라고도 한다. 중종이 재위 14년(1519) 11월 신무문으로 남곤(南袞) 등을 불러 밀지(密旨)를 내린 것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른 궐문의 열쇠는 승정원에서 관장했지만 북문인 신무문만은 환관들이 관장했기에 승지들을 따돌리기 위해 신무문으로 부른 것이었다.

 중종은 남곤 등을 신무문으로 불러들여 추자정(楸子亭)에서 몰래 만나고 난 후 합문(閤門)으로 대신들을 불러 마치 조정에서 조광조 등을 죄 주기를 청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다. 승지(承旨) 성운(成雲)은 중종에게 “승지와 사관이 이 일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임금의 호상(好尙: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야지 이렇게 비밀스러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박했다. 중종은 몰래 추진했던 기묘사화 때문에 역사의 용군(庸君)으로 전락했다.

 숙종은 재위 43년(1717) 7월 19일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李?命)과 독대했다. 이해가 정유년이기에 정유독대(丁酉獨對)라고 부른다. 승지 남도규와 기사관(記事官) 권적이 입시하려 하자 환관이 ‘좌의정 혼자 입시하라는 명’이라고 막았고, 기사관 권적이 “죄벌을 받더라도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들어가려 하자 겁을 낸 남도규가 말렸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독대는 진행되었는데, 이 날짜 사관(史官)은 “이날 임금과 나누었던 말은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독대 직후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의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세자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독대는 세자 교체 음모였다. 이때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관을 들고 상경해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이이명) 또한 어찌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위로써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 28일)”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독대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배석해 대화를 기록해야 했다.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국정(國政)은 해 아래 떳떳해야 한다는 철학의 반영이었다. 선거판을 뒤흔드는 사찰 통치의 망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도는 조선처럼 독대 자체를 금지시키고 대통령의 모든 언행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언제까지 후진국 정치의 망령이 반복돼 대한민국 국민임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겠는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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