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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위기, 주목받는 ‘사민주의 아버지’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해 사회주의가 사는 길을 닦았다. 베른슈타인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미국 사람들이 미국이 유럽처럼 되는 것을 걱정한다. ‘유럽처럼’된다는 것은 미국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의 우려를 반영하듯,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2009년 2월 16일자 표지를 장식한 것은 “우리는 이제 모두 사회주의자다”라는 큰 제목과 “새로운 큰 정부 시대의 위험과 약속”이라는 부제였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9>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일본의 민주당과 사민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다. 사회민주주의의 뿌리는 레닌주의·스탈린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다. “자본주의는 망한다”고 호언하던 소련·동구권의 사회주의는 붕괴했으나 사회민주주의는 살아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혁주의(reformism)와 수정주의(revisionism)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스스로 부정하고 극복하는 한편 자본주의를 수용했다. 개혁주의와 수정주의의 창시자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이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엥겔스가 총애유언장 집행자 중 한 명
베른슈타인은 하류 중산층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관공으로 일하다 철도기관사로 전직한 인물이다. 베른슈타인은 16세까지 김나지움(독일의 국립중등학교)에 다닌 다음 사회로 진출해 은행원으로 12년간 일했다. 그가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 된 것은 1872년이다. 1873년 시작된 경제위기는 10여 년을 끌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측에 확신을 갖게 됐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했다. 독학으로 대중 연설과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당 지도자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1881~1890년에는 당 지하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자로 활동하며 일급 이론가로 떠올랐다.
1878~1901년에는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른슈타인은 정부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영국에서는 마르크스(1818~1883)와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로 불리는 엥겔스(1820~1895)를 만났다. 특히 엥겔스가 그를 좋아했다.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엥겔스는 베른슈타인에게 마르크스가 남긴 유고로 『자본론』 제4권을 집필할 수 있는지 의뢰하기도 했다. 엥겔스가 사망하자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유언장 집행자 중 한 명이 됐다.

베른슈타인은 영국에서 페이비언협회(1884년 창립된 점진적 사회주의 단체)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그는 독일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앞선 영국의 현실도 목격했다. 의회민주주의 틀 속에서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예측과 19세기 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따로따로였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 필요했다. 베른슈타인은 1896~98년에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1899년 책으로 출간된 논문들이다. 책의 영문판 제목은 ‘점진적 사회주의(Evolutionary Socialism)’(1909년)다. 베른슈타인은 1901년 독일로 귀국했다. 그가 마르크스 이론을 비판했기 때문에 독일 당국의 귀국 허가가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낡고, 애매하고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비판해야 마땅하며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사기’ ‘함정’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이 목격한 자본주의는 실업, 과잉생산, 불균형한 부의 분배의 문제를 극복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 격화의 필연적 결과는 혁명이라고 했으나 노동자들의 형편은 나아지고 있었다. 계급의 분화로 ‘자본가 대(對) 노동자’의 첨예한 구도도 흔들리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통계 수치를 인용하며 자본 집중이 중산층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베른슈타인을 비판하는 당내·외 이론가들은 그가 “영국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도 급변하고 있었다. 1890년대 독일 경제는 호황이었다. 대중 소비시대가 서서히 개막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단은 의회민주주의였다. 그는 민주주의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평화적으로 발전하는 게 가능하다고 봤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따위는 불필요했다. 대신 노동자들은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했다. 법적·제도적 개혁으로 빈부 차이를 점진적으로 없앨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베른슈타인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계급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화이트칼라 노동자,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들마저도 ‘기생충’이라고 외면할 게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베른슈타인은 “운동이 전부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외쳤다. 민주주의를 구사해 자본주의를 인간화하는 움직임과 변화가 전부라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한다는 목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공통의 기반이 있다며 “사회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최종 결과물이다”라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는 사회주의에 신(新)칸트 철학을 접목시키기도 했다. 사회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윤리적 차원에서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베른슈타인에게 사회주의는 과학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됐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발전을 설명할 때 경제적 요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다. 베른슈타인은 비경제적인 요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베른슈타인은 막스 베버(1864~1920)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1905)에 영감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은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대해 우호적으로 다룬 최초의 사회주의자 중 한 명이다. 한편 식민지 사람들의 독립이나 자치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엥겔스도 수정주의를 지지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비판하는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신(神) 없는 칼뱅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자본주의 붕괴론은 장 칼뱅(1509~1564) 신학의 ‘예정설’과 같다는 뜻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원칙적으로 수정주의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또한 그들 시대의 수정주의자였다. 그들은 사회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정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반대편 진영에서는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구 혁명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의 특징은 절대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영구 수정주의(permanent revisionism)’라는 맞불을 놨다.

수정주의는 절대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수정주의 주장으로 사회주의 운동권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미 실천에 있어서는 베른슈타인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1903년 드레스덴 당대회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아직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었다. 공산당의 전위정당(vanguard party) 역할과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소련 지도자 레닌(1870~1924)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하는 부르주아 이념체계라고 단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두고 갈라섰다. 개혁파 사회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 혁명파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라고 불리게 됐다. 1950년대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베른슈타인의 아이디어들을 대부분 수용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계속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중도 좌파에서 중도파로 움직이다 결국에는 중도 우파와의 구별도 애매하게 된 경우도 많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결고리는 대부분 끊어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스로 버린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요, 얻은 것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 베른슈타인들의 후예들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서방 선진국에서 집권을 경험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정치가·작가 밀로반 질라스(1911~1995)는 공산당 간부를 지냈으나 나중엔 베른슈타인처럼 마르크스 이론을 거부했다. 질라스는 1954년 “당신은 베른슈타인주의자”라는 당의 단죄를 받았다. 질라스는 “읽은 적도 없다”고 대꾸했다.

세계 곳곳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1%와 99%의 대립을 정치 쟁점화하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살아 있으나 건재(健在)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민주주의는 빈사상태에 빠졌다”라는 주장도 나온다. 사회민주주의도 아이디어가 고갈됐다.

자본주의를 넘어 뭔가가 있고, 그것을 평화적·점진적 발전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질라스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명의 베른슈타인주의자’가 돼 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위기, 복지국가의 위기,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서로 맞물려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로 사회주의를 살리고 복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베른슈타인의 논리가 오늘날에도 맞는다면 위기의 타개의 길은 끊임없이 개선하고 변화하는 ‘영구 수정주의·개혁주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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