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번외편> ‘이헌재 사단’을 위한 변명

1998년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구조조정을 위해 직접 데려온 사람은 딱 둘이다. 한국 신용평가에서 함께 일했던 서근우와 이성규. 99년 1월 이 위원장(오른쪽)에게 임명장을 받는 서근우 금감위 제3심의관(왼쪽). 왼쪽 둘째부터 이우철당시 기획행정실장, 김종창 상임위원, 이용근 상임위원, 윤원배 부위원장. [사진 서근우 금융연구원 자문위원]


2001년인가, 나는 졸지에 사단장이 됐다. 한 신문이 기사에 ‘이헌재 사단’이라는 말을 처음 쓰면서다. 말이 실체를 규정한다더니, 실체도 없는 사단이 그렇게 창설됐다. 사단장인 나는 인사권도 없었다. 사단 멤버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바뀌었다. 지금도 내 이름을 대면 많은 이가 ‘이헌재 사단’이란 말을 자동으로 떠올릴 정도다.

정부 떠나 20년 낭인 … ‘이헌재 사단’은 없다



 사단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정부에서 10년, 다시 정부를 떠나 20년. 정처 없이 살았다. 인맥을 만들 시간도 없었다. ‘이헌재의 사람’이라고 불릴 이를 어떻게 키웠겠는가.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짐작된다. 외환위기 당시, 인적 쇄신이 불가피했다. 기왕 있던 사람 입장에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이헌재와 특수 관계’라고 몰아붙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특히 구조조정을 위해 내가 쓴 젊은 학자들에 대해 저항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주변 이들을 ‘이헌재 사단’이라 묶어 부른 게 아닐까.



 검증된 사람을 썼다. 친한 사람을 쓴 게 아니다. 지연·학연도 따지지 않았다. 두 번이나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항상 사람을 관찰한다. 그리고 ‘이런 데 쓰면 좋겠다’ 며 머릿속에 저장한다. 인재 창고라 할까. 지금도 웬만한 조직을 만들라고 하면 몇 시간 안에 사람 배치를 끝낼 수 있다. 그 속엔 스쳐가듯 만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끔 내가 “파격 발탁을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대부분 ‘머릿속 인재 창고’에 저장됐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고(故)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이 그랬다. 내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을 지낼 때 한신평 주주인 한국종합금융의 사장이었다. 성격이 어찌나 깐깐한지 나는 그와 지겹게 싸웠다. 1998년, 그런 그에게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총괄하는 기업구조조정위원회를 맡겼다. 실력 있고 적임자라서다. 연배로 보나 자존심으로 보나 나를 사단장으로 모실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도 사단 멤버로 거론되곤 했으니, 엉터리다.



1998년 9월 11일, 김종필 국무총리는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경제 5단체장을 불러 기업 구조조정 방안을 설명했다. 첫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 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구평회 한국무역협회장, 김종필 국무총리, 김우중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김영배 국민회의 부총재, 정해주 국무조정실장,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박상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김용환 자민련 수석부총재,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이기호 노동부 장관. [사진 이헌재 전 부총리]


 일면식 없는 사람도 갖다 썼다. 김기홍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보험에 밝다기에 얼굴도 보지 않고 썼다. 98년 한빛은행을 맡겼던 김진만 전 행장이나 서울보증보험 대표로 발탁했던 박해춘도 마찬가지다. 금융감독위원장이 되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박해춘은 98년 가을 서울보증보험 설립 직전 처음 봤다. 당시 삼성화재 상무였다. “공무원이 아닌 보험 전문가를 찾으라”고 했더니 누군가 추천했다. 만나 보니 뚝심이 있어 보였다. 부실 보증보험의 청소(구조조정) 작업을 맡길 만하다 싶었다. 그런 뒤엔 현직에 있을 때 그를 두세 번 정도 만났을까. 그런 박해춘도 사단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아끼는 후배는 분명 있다. 하지만 내가 공직에 있을 동안만이다. 공직을 떠나고 나면 내 주변 이들은 언제나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맨몸으로 떠났다. 공무원으로 일을 배워 그렇다. 공무원은 언제나 맨몸으로 부임하고 맨몸으로 떠난다. 누구를 데리고 다닐 수 없다.



 DJ 정권에서 금감위원장을 맡으면서 데려온 이는 딱 두 명이었다. 한신평에서 함께 일했던 서근우와 이성규다. 나머지는 국책 연구소 학자 아니면 공무원이었다. 내가 데려올 수도, 데려갈 수도 없는 이들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의 최범수, 증권감독원 출신으로 대변인을 시켰던 김영재도 사단 멤버로 자주 꼽힌다. 지금도 자주 밥을 먹는 후배들이다. 이들을 포함해 누구도 공직을 그만두며 함께 나온 적이 없다.



 가끔은 나를 ‘모피아(MOFIA·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의 대부’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공무원의 속성을 몰라도 한참 모르니 나오는 얘기다. 고위 공무원 사회는 어느 조직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한번 삐끗하면 그걸로 끝이다. 강에 배 지나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70년대 말에 그렇게 재무부를 떠난 나다. 어떻게 후배들에게 대부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된 이들은 손해를 많이 봤다. 잘 되면 “이헌재가 뒤를 봐줬다”고 색안경을 끼고 봤다. 나는 후배의 후직(後職)을 알선하지 않는다. 후배 인생을 망치는 길이라서다. 누구 부탁으로 간 자리는 3년을 못 버틴다. 실력 있는 친구도 ‘청탁으로 들어왔다’는 꼬리표가 달린다. ‘생색 좀 냈다’ 싶으면 가장 먼저 자르게 돼 있다. 나는 후배들에게 미리 경고한다. “아무 것도 못 해준다. 기대하지 마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나중에 잘 됐다. 이성규는 언젠가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이헌재 장관은 뒤를 봐줘야 할 것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쓰지도 않는다.” 대표적인 사단 멤버로 꼽히는 그가 그리 말하니 건방져 보이지만, 맞는 말이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