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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에서 만난 ‘솔 푸드’

일 때문에 읍내에 나갔다가 점심 무렵 인근 암자에 들렀다. 밥상에 봄동 겉절이가 올라왔다. 눈과 코 등 오감(五感)이 동시에 거기로 향했다. 맛있는 게 사방에 널려 있는 세상이건만 소박한 맛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 화려한 음식도 따라갈 수 없다. 봄동 겉절이는 잔설(殘雪)이 드문드문 한 이른 봄날 텃밭에 나가서 줍듯 소쿠리에 담은 후 별다른 솜씨를 더하지 않고서도 후딱 만들어낼 수 있는 음식이다. 흔한 듯하면서도 귀한 그 맛은 마음까지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말 그대로 ‘솔 푸드(soul food)’였다.

봄동은 늦게 파종한 배추다. 하지만 보통 배추와 달리 속을 채우지 못한 채 밭에서 겨울을 보낸다. 잎 역시 쫙 펴진 상태로 땅바닥을 기어가는 모양새다. 맛과 냄새도 배추라고만 할 수 없는 또 다른 향미가 있다. 배추이면서 배추가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라고나 할까. 이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주변 환경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는 여유로움을 통해 도리어 자기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설의 아름다움까지 보여준다.

며칠 전엔 오솔길 끝에 숨은 듯 자리한 음식점에서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다쿠앙’을 만났다. 흔히 접하던 무에 물만 들인 노란 단무지가 아니었다. 꼬들꼬들하게 약간 마른 듯한, 단단한 겨울무로 제대로 만든 것이었다. 옛맛을 그대로 간직한 솔 푸드였다. 쌀겨 속에서 노랗게 물이 들면서 익어가던 그 풍경까지 아련하게 떠올랐다. 섬세한 성정의 안주인은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다상(茶床)을 파할 무렵 작은 반찬통을 건네주었다. 다쿠앙 선물이었다.

다쿠앙은 절집에서 유래했다. 일본 도쿄의 동해사(東海寺)에 어느 날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이에미쓰(家光) 장군이 찾아왔다. 절에 머물던 다쿠앙(澤庵·1573~1645) 선사는 산해진미에 이골이 난 장군을 위해 단무지를 준비했다. 장군은 그 담백한 맛에 흠뻑 반했다. 그는 식사 후 이 노란 무를 선사의 이름을 따 ‘다쿠앙’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단순한 맛이 오히려 복잡한 사람을 감동시킨 힘이 된 것이다.

‘봄동’이란 이름은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작명 실력이 이에미쓰 장군보다 한 수 위라고 하겠다. 봄은 우리말 ‘봄’이고, 동은 한자어로 겨울인 ‘동(冬)’일 것이다. 봄나물을 상징하는 쑥이나 냉이는 겨울과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겨울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나물이다. 하지만 절기란 두부 자르듯 나눠지는 게 아니다. 겨울은 봄을 안고 봄은 겨울을 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거두어 주는 가운데 서서히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이치를 아는 중도(中道)적 안목을 지닌 어떤 이가 ‘봄동’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봄동은 봄이라고 해서 결코 겨울을 버릴 수 없는 몸이 됐다. 그 덕분에 겨울과 봄을 포섭하는 두 가지 맛을 가진 사실까지 모두 알게 됐다.

봄동 겉절이는 겨울을 지났음에도 잎은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 자비심을 가득 안고 모진 추위와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리라. 설한(雪寒)을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본 게 아니라 같이 즐긴 것이다. 만약 봄까지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겨울과 다투듯 버텼다면 그 잎은 매우 질겼을 것이다. 그랬다면 봄이 열 번 온다 한들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자비심은 스스로를 부드럽게 가꾼다. 더불어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환하게 바꿔준다. 어쨌거나 그런 솔 푸드를 만난다는 건 그 자체로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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