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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김정남 남한 친구 여럿, 여성 편력 심해…"

2010년 6월 마카오의 한 호텔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하는 김정남. 한국 언론과의 첫 만남이었다. [중앙포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픈 평범한 한 인간.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한국어판 내는 고미 요지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41)에 대한 고미 요지(五味洋治·54) 도쿄신문 편집위원의 평가다. 그는 7년에 걸쳐 김정남과 150통의 e-메일을 주고받고 7시간의 독점 인터뷰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김정남의 인생을 재구성한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중앙m&b)를 펴냈다.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20일 그를 만났다. 김정남을 만난 한국 언론사는 중앙SUNDAY(2010년 6월 6일자)가 유일하다. 하지만 김정남은 그 후 한국 기자들의 취재를 모두 따돌리고 있다. 반면 일본인인 고미 위원에 대해선 다른 태도를 보였다. 명함을 건넨 고미 위원에게 김정남은 인사차 e-메일을 먼저 보내고 “적절한 시기를 봐서 책으로 출간하자” “모든 질문을 받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고 한다.





고미 요지 일본 도쿄신문 편집위원
-수많은 기자 중 왜 당신을 택했 나.



 “질문을 2개로 제한했다. 부담을 줄여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다. 오후 1시 e-메일을 보내면 30분에서 1시간 사이에 답이 왔다. 한국 기자들은 공격적으로 난감한 질문을 하지만 일본 기자는 더듬더듬하니 여유를 느낀 것 같다. 2004년 베이징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명함만 준 후 끝까지 뒤쫓지 못한 한으로 (김정남이) 꿈에 나타났었다. 한 기사에서 “꼭 뵙고 싶다”고 끝맺은 게 그의 마음을 움직인 듯하다. 그는 2001년 불법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다 추방됐지만 조총련 사람들에게 황태자 대접을 받는 등 일본에 대해선 좋은 기억도 갖고 있다.”



 -책의 내용이 김정남의 진심인지 알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 노동당의 나팔수 역할을 하겠다는 거냐, 이용당하는 거다라는 비판을 들었다. 폐쇄 국가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자는 기자 근성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북한 황태자의 감정을 만천하에 드러내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란 걸 보여주고 북한 주민에 개혁·개방의 희망을 갖게 하면 충분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북한 내부 사정을 묻는 질문은 교묘히 빠져나가고, 자기 의견 만 반복하는 게 언론플레이처럼 느껴져 짜증도 났다. 그러나 서신 행간엔 누군가에게 어필을 하고픈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탈출구를 찾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방탕아부터 북한 자금관리책이란 소문까지 시각이 다양하다.



 “표현 방식이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핵개발과 세습 정치에 대해 강한 비판을 견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부 사정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연평도 도발도 북한 군부의 자구책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논리적이고 북한 실상을 꿰뚫고 있는 지적인 인상이었다. 또 한 잔에 5만원짜리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다섯 잔 꿀꺽꿀꺽 들이켜는 애주가였다. 스스로 여성 편력이 심하다고 인정도 했다.”



 -중국이 그를 보호하고 있나.



 “2011년 1월 베이징의 한 카페에서 김정남을 만날 때 중국 공안들이 웨이터를 가장해 잠복해 있었다. (김정남은) 악수를 하며 나를 ‘형님’이라고 친근하게 불렀지만 땀을 흘리며 긴장하는 듯했다. 인터뷰 중에도 스마트폰에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수시로 확인, 답신하곤 했다. 페이스북·트위터에 집착하는 데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남한 친구가 여럿 있다며 정기적으로 마카오에 와 식사하는 남한 사업가도 있다고 해서 놀랐다.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보낸 9년간의 유학 시절이 행복했고, 그 때문에 한국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익숙하다고 했다. 프랑스에도 집이 있고 언젠가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도 얘기했다. 그 때문에 프랑스 망명설도 나왔을 것이다.”



 - 아버지(김정일)를 옹호했다는데.



 “그는 가끔 평양에 가도 아버지와 만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가끔 (예를 들어 생일) 아버지에게 국제전화를 받은 정도였다고 했다.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편지에서는 ‘북한의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개혁·개방에 대한 일관된 강조는 아버지와 당 지도부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군부, 명시하진 않았지만 이영호 총참모장 등이 아버지를 부패한 이미지로 비치게 한다며 이들에게 좋은 길을 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를 통해 언론에 자기 생각이 보도되자 북한의 경고를 받고선 자조적 태도로 변했다.”



 - 아버지 탈상 후 출간하라 했는데.



 “ 정권 교체기 가 지나면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그를 보호할 것이므로 이한영(탈북 후 북한을 비판하다 1997년 살해된 김정일의 처조카)처럼 되지는 않을 거라 확신한다. 평양에서도 개혁·개방을 위해 김정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고 들었다. 이게 적대국 기자에게 친근하게 답해준 김정남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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