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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61) 해프닝으로 끝난 화폐 개혁

2004년 가을 활발하게 이뤄졌던 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 단위 절하) 논의는 결국 유야무야 끝나고 만다.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2006년 퇴임 기자회견에서 “화폐제도 개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사진은 2005년 4월 화폐 디자인 변경을 발표하는 박 총재. 유로화를 보여 주며 위조 방지장치를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화폐 액면 단위를 낮추는 것.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이를 진지하게 추진했었다. 화폐 도안까지 디자인해 놓았을 정도였다. 정치권의 반대가 없었다면 진작에 실현됐을 것이다. 박 총재가 내게 디노미네이션 얘기를 처음 꺼낸 것은 2004년 4월께. 대통령이 탄핵으로 자리를 비운 때였다.

백년 내다본 디노미네이션, 시시비비 끝에 좌초



 “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무진은 검토를 거의 끝냈습니다.”



 큰 틀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격(國格)이란 게 있다. 다른 나라에선 1로 불리는 화폐가 우리나라에선 1000이라 불리는 화폐와 교환되고 있다. 한국의 위상에 더는 맞지 않는다. 나라 전체가 은연중에 얕잡아보일 수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 것도 문제였다. 이미 당시에 정부 총예산은 100조원대에 진입했다. 국내 총생산(GDP)이 1000조원대에 진입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더 올라가면 복잡해진다. 천조 다음엔 뭔가. 경(京)이다. 낯선 단위의 등장이다. ‘혼란을 주느니 천조 다음엔 만조가 어떨까… 거시 경제에선 조가 기준 단위가 돼 가고 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디노미네이션 논의를 피해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100원, 500원은 보조 화폐 기능밖에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작업이 아니다. 화폐 체계를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다. 돈은 물론 돈을 세는 기계, 자판기까지 모두 교체해야 한다. 기존 문서나 프로그램들도 다 손을 봐야 한다. 나쁘게 보면 비용 발생이요, 좋게 보면 내수가 진작되는 기회일 수도 있다. 신·구 화폐 교환에 따른 사회적 저항이나 우려는 교환 기간을 충분히 주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걱정은 물가다. 화폐 단위를 1000분의 1로 줄인다면 기존의 10원, 50원은 사실상 기능을 잃게 된다. 이런 우수리들이 다 절상되면 물가가 오르지 않을까. 700원짜리 라면이 0.7원이 된다면 라면 업체들은 그냥 1원이라고 써 붙여 팔지 않을까. 그러면 서민들에게 타격이 된다. 박 총재는 나를 안심시켰다.



 “이미 물가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다 검토했습니다. 물가 상승 효과는 1%포인트도 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몇 년 가지 않고 안정될 겁니다.”



 “좋습니다. 대통령이 돌아오시면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박 총재가 서두른다는 느낌이었다. 디노미네이션을 준비하려면 최소한 1~2년은 걸린다. 자신의 임기 중에 추진 방향이라도 잡아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탄핵 정국이 미처 풀리기도 전에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언론에 새어 나간다. 5월 초, 나는 기자들에게서 디노미네이션 관련 질의를 받았다.



 “재경부 장관이 그런 것까지 검토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없는데 화폐 개혁 논의가 시작될 수는 없는 일. 시치미를 뗀 것이다. 그리고 탄핵에서 돌아온 노 대통령에게 나는 한국은행의 구상을 전달했다.



 “그런가요?”



 노 대통령은 부정적이지 않았다. 자기 생각과 다른 부분에 대해선 바로 지적을 하는 성격이다. ‘일단 검토를 진행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박 총재와 서너 번 정도 만나 논의를 했다. 나는 꼭 달러 수준에 맞춰 1000분의 1로 액면가를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가 효과를 고려하면 100분의 1로 절하해도 괜찮다고 봤다. 그 정도도 100년은 문제없이 갈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재경부 공무원들은 소극적이었다. 새로 일을 벌이기가 번거로웠을 것이다.



 9월 국회에서 이를 두 차례 언급한 건 여론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재정위와 예산결산특위에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화폐단위 변경 문제는 연구 검토 단계를 지나 구체적인 검토의 초기 단계에 와 있다”고 답한 것이다.



 그러자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다시 급부상했다. 언론에서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5만원권, 10만원권 등 고액권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여당 의원들은 “차라리 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였다. 정치 쟁점으로 비화하는 분위기였다. 여권의 일부 젊은 의원들까지 ‘딴지’를 걸고 나왔다. “물가 상승으로 서민들에게 고통을 줄 거다” “시장의 충격이 너무 클 것이다” 등 시끄러웠다. 논의를 조용히 덮었다. 정책만 내면 사사건건 공격을 받을 때다. 부동산 양도소득세 등으로 청와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급한 일도 아닌데 또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2009년 발행된 5만원권은 서둘러 만든 느낌이 있다. 디노미네이션을 준비하던 한국은행이 갑자기 고액권을 발행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신사임당을 내세운 것이나 화폐의 질이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힘있는 정부에서는 길게 보는 논의가 가능하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참여 정부에선 그게 어려웠다. 사소한 정책 하나도 근본적인 시비에 휘말렸다. 그것도 여권 인사들과 말이다. 다 합의해 놓은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기도 했다. 정책을 담당하지 않는 이들이 정책에 대해 딴소리를 냈다. 그런 분위기에선 준비에만 1~2년이 걸리는 디노미네이션 같은 정책은 애초 불가능했다. 정치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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