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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미국서 니콜 키드먼과 ‘스토커’ 찍은 박찬욱 감독

때때로 낯설다고 했다. 영어를 쓰고 있고, 백인들이 나와서 연기하는 게. 영화 중간에 나오는 음악도 미국 노래니까, 내 영화 같지 않고 참 낯설더란다. 박찬욱(48) 감독의 얘기다. 자신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첫 영어 영화가 될 ‘스토커(Stoker)’를 만들며 그런 느낌이 들었단다. 그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팬들에게는 언제나 그랬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 그의 영화는 언제나 낯설고 새롭고 파격적이었다. 그게 박찬욱의 힘이었다. 그에게마저 낯선 작품이라면 우리는 또 얼마나 엄청난 것을 만나게 되는 걸까.



니콜 키드먼은 악바리…한 장면 100번 찍자고 하면 100번도 찍을 사람이다
복수·잔혹 코드? 난 그런 사람 아니다

 박찬욱. 한국 영화계의 자랑이었던 그의 이름이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안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소재 고갈과 참신한 연출에 목마른 할리우드가 그에게 메가폰을 맡긴 것이다. 그 시작이 올 하반기에 개봉될 영화 ‘스토커’다. ‘석호필’로 유명한 프린스턴대 출신의 배우 웬트워스 밀러가 각본을 쓰고 니콜 키드먼, 미아 바시코브스카, 매슈 구드 등의 할리우드 스타가 출연하는 1200만 달러 예산의 영화다. ‘블랙 스완’ ‘디센던츠’ ‘사이드웨이’ ‘슬럼덕 밀리어네어’ ‘소년은 울지 않는다’ ‘리틀 미스 선샤인’ 등 아카데미 수상작을 줄줄이 배출해 온 폭스 서치라이트 스튜디오가 제작을 맡았다. 지금 할리우드에선 수많은 연예 전문지가 매일같이 ‘스토커’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영화가 올해 칸 영화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될 수 있을지가 지금 이들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다. 할리우드에서 박찬욱의 입지와 그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크다.



 한국의 눈이, 할리우드의 눈이, 세계의 눈이 그에게 쏠려 있다. LA에 머물며 영화 후반작업 중인 박찬욱 감독을 단독으로 만났다. 영화 ‘스토커’와 그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한국 언론에 직접 들려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찬욱의 또 다른 우주, 스토커.



●‘스토커(Stoker)’, 어떤 영화인가.




 “교외 외딴 저택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엄마·아빠, 그리고 사춘기 딸. 그런데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 장례식날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녀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다. 엄마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딸은 아예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장례식날 그 삼촌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집에 눌러앉는다. 그리고 이 모녀와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스토커’란 제목이 ‘드라큘라’의 작가인 브람 스토커에서 나왔다는 소리가 있다. 삼촌 캐릭터인 ‘엉클 찰리’도 히치콕 영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던데.



 “그건 맞는데, 뱀파이어 얘기는 아니다. 초고를 쓴 웬트워스 밀러의 오마주일 뿐이다. 그가 히치콕 영화 ‘의혹의 그림자’도 좋아했던 모양인데, 그 영향을 받았다는 표시를 내려고 엉클 찰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2010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그해 영화화되지 않은 시나리오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을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선정한 리스트)’에 올라 있던 작품이다. 다른 시나리오들과 비교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들어왔던 작품들이 다양했다. 복수극도 많았다. 그러다 에이전트와 매니저에게 아무거나 보내지 말고 분야를 좀 한정해서 웨스턴, Sci-fi(공상과학소설), 에스피오나지(스파이가 등장하는 첩보영화), 심리 스릴러류만 가져오라고 했다. ‘스토커’의 경우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 중심 인물 딱 세 명으로 집안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부담도 적었다. 소우주를 설정해서 그 작은 세계를 통해 큰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원래 좋아하던 요소다. 처음 감독이 되고 영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게 해준 영화가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이었는데, 그의 영향 아래 쓰인 작품으로 첫 영어 영화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캐스팅이 쟁쟁했다. 주연 배우들은 어땠나.



 “니콜 키드먼은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냉정한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열정적 프로페셔널이다. 자기 방법론이 확실하고 우왕좌왕하는 법이 없다. 집에서 많은 궁리를 해보고, 현장에서는 완벽하게 준비된 몇 가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쉬는 시간’, 좋아하는 것은 ‘계속 찍는 것’이다. 감독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너무나 뚜렷하다. 한 쇼트를 찍을 때 백 번을 찍자면 찍을 사람이다. 자기가 ‘이만하면 됐다’고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뭐든지 할 테니 말씀만 하세요!’다.”



●현장에서는 왜 직접 영어로 지휘하지 않았나. 영화에 출연한 매슈 구드가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어를 훨씬 잘하는 것 같은데 현장에선 통역만 쓰더라’고 했던데.



 “정말 통역이 필요하고, 다행히 완벽 그 이상의 통역사를 만나 훌륭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런 법이 별로 없는데 배우들이 인터뷰할 때 ‘정원조’라는 통역 이름까지 거론해 가며 칭찬을 하더라. 우리 회사 직원이지만 참 대단하다.”



●다 같이 모여 회식을 한 적도 있나.



 “물론. 하지만 한국처럼 자주 하지는 않는다. 모든 캐스트와 크루가 다 모인 회식 자리는 쫑파티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번은 미아, 니콜 부부, 스튜디오 회장까지 데리고 LA 한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다들 ‘환장’을 하더라. 미아는 확실히 어린 여자라 그런지 후식으로 나온 팥빙수를 내것까지 가져다 먹었다. 한국 음식의 인기를 실감했다.”



●콜린 퍼스, 제임스 프랑코, 루니 마라 등 거론됐다 출연이 무산된 배우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지금 함께해 준 배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다. 고마울 지경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함께 일해 보고 싶은 배우는.



 “개리 올드먼.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를 보고 완전히 반했다. 그리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A Separation)’에 나오는 이란 배우들. 요즘 본 최고의 연기였다.”



●일찍부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영화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들었는데.



 “맞다. 그걸 직접 하지 못한 것은 ‘너무 좋아하니까’여서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각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도, 또 모르는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각색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영화로 나오고 나서는 극장에 가서만 두 번을 봤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나 ‘올드보이’ 리메이크를 맡은 스파이크 리 감독을 만나본 적은 있나.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스필버그 감독은 항상 뭘 찍고 있거나, 후반 작업 중이거나, 여하튼 쉴 새 없이 바쁜 분이라 기회 만들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스파이크 리 감독도 마찬가지다. 사실 스파이크 리와 ‘올드보이’는 사람들이 ‘정말?’하고 물을 만큼 쉽게 연결하기 힘들다. 그런 거장이 맡은 만큼 ‘올드보이’가 어떻게 나올까 더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스토커’에서도 박찬욱 영화 특유의 잔혹함, 파괴 본능, 복수 등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한다. 또 감독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이들도 많다.



 “그동안 그런 걸 많이 만들었으니 당연한 생각이다. 나에게 복수의 테마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조금씩은 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스릴러적이기도, 미스터리적이기도 하고 폭력적이기도 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복수를 피해갈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차라리 그런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폭력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데 너무 서툴고 두려움을 갖고 있어 오히려 영화에서는 그런 것을 자주 다루게 되는 듯하다. 옛날엔 가톨릭 신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 종교는 없다. 하지만 반감도 없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을 존경한다. 내가 존경하는 위대한 예술가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예를 들면 정말 독실한 신자였던 바흐처럼.”



한국, 그리고 할리우드



지난 5일 미국 LA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박 감독은 인터뷰 약속을 잡으며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인터뷰 당일 자신의 숙소 근처에서 기자를 만났을 때는 마음이 약해진 듯 카메라를 위해 잠시 포즈를 취했다.[사진=LA중앙일보 김상진 기자]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기, 뭐가 제일 달랐나.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한국에서 하던 강도에 비하면 거의 ‘미친 듯이’ 찍어야 하는 속도였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촬영 횟수가 적고 현장이 바쁘니 감독이 특별히 꼭 와서 보라고 하기 전까지는 배우들이 모니터를 보러 오지 않았다. 한국에선 배우들이 화면에 자기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해 너무 예민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선 그런 일이 없더라. 자기 배역의 감정에만 몰두해 빠져나오지 않고 감독이 ‘컷’을 외쳐도 그 감정 그대로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다음 테이크를 찍으니 배우가 감정에 들락날락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현장 편집도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테이크를 찍을 때마다 되풀이해서 재생해 보고 현장 편집을 그 자리에서 해 넣어 보고 뭐가 더 필요한지 등을 토론해 가며 찍는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서로 도란도란 의논해 가며 공동으로 창작해 가는 과정과 느낌을 좋아하는데, 한국과 달리 여기선 그런 게 전혀 없다. 반면 빨리 찍어야 하니 일이 신속하게 돌아가고 감독의 의사가 쉽게 관철되는 부분도 있었다.”



●할리우드의 좋은 점, 여기서 배워 가고 싶은 점은.



 “좋은 스토리와 좋은 각본이 많이 돌아다닌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서 못 찍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서부극이라든가, 인종과 관련된 문제를 그린 영화 같은 것은 한국에선 다루기 힘들겠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전보다 좀 빨리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사실 그간 촬영 횟수가 점점 길어져 온 궤적이었다. ‘박쥐’는 90회 이상 찍었는데 이번에는 40회 만에 찍었다. 물론 영화의 규모가 작아서 ‘박쥐’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딱 12시간씩 40회였으니 정말 빨리 찍은 거다. 영화를 ‘빨리 찍겠다’는 말엔 사실 많은 게 들어가 있다. 마치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는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된 것처럼 필요한 사항도 많고 조금씩 손 봐야 할 일들도 많을 테니까.”



●반면 한국의 시스템이 좋았던 점은.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영화계의 조감독과 연출부. 난 그들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지 몰랐다. 제일 보고 싶은 게 우리 조감독이었다. 여기 조감독은 ‘이 쇼트를 15분 내에 찍지 못하면 오늘 당신이 찍고 싶은 장면 중 몇 개는 포기해야 할 거다’라는 식의 소리만 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럼 이번에도 함께 ‘스토커’ 작업을 한 정정훈 촬영감독이 큰 도움이 됐겠다.



 “정말 많은 힘이 됐다. 같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자기 일을 잘하기도 하고, 조명팀·그림팀 등 촬영에 관계된 수많은 팀을 수족처럼 부려가며 현장을 통솔하는 데 기가 막히게 공을 세웠다. 나도 놀랐다. 오랜 세월 같이 일했지만 그렇게 뛰어난지 몰랐었다. 정정훈 감독은 할리우드는 당연히 처음이고 영어도 못한다. 열 마디로 싸우고 화해하고 모든 걸 다 해결하더라. 현장에서 인기도 정말 좋았다. 니콜 키드먼은 와서 안마도 해주더라(웃음).”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며 한국 영화의 위상을 다르게 느꼈을 것 같다. K팝 등의 인기도 실감했나.



 “미국의 대중은 자막 읽기를 싫어해 ‘영화광’들 빼고는 잘 모른다. 반면 언제나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할리우드 업계 종사자들은 모두가 한국 영화를 알고 있고, 100% 한국 주요 감독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다 꿰고 있다. 영화 면에서 봤을 때 한국은 확실히 강국 중 하나다. 드라마나 음악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영화 종사자들은 그렇다.”



●한국영화의 힘이 뭐라고 생각하나.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물의 감정도 아주 절절하고 그 진폭도 크다. 과장되거나 멜로드라마틱한 면에서 그런 게 아니라 인물이 보다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며 큰 폭의 감정 진동을 보여준다는 점이 보편성을 얻는 듯하다. 동시에 장르적인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 않기 때문에 ‘졸리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나만의 작품, 나만의 개성.



●할리우드가 왜 박찬욱이란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을까.



 “글쎄, 그건 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 아닐까. 외국 감독이긴 하지만 장르 영화적인 면이 있어서 상업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감독으로서 작품성과 흥행성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나.



 “나는 작품만 생각한다. 그 다음에 그 기획이나 각본을 들고 돈을 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그들이 돈을 대 주면 그게 흥행성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본다. 흥행의 전문가들이 보기에 투자해서 돈을 날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선 것일 테니 말이다. 만일 그들이 돈을 댈 수 없겠다 하면 못 만드는 것이고, 그럼 다른 작품을 하면 될 일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할 ‘설국열차’의 제작을 맡고 있다. 제작자로서의 생각은 어떤가.



 “제작자로서는 입장이 좀 달라진다. 투자 끌어 온 것을 날리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더 크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봉준호란 감독은 뭘 갖고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설국열차’도 잘 준비되고 있다. 캐스팅이 완료돼 가는 중인데, 이쪽에서도 다 놀랄 정도의 캐스팅이라는 것만 말하겠다.”



●언제나 ‘개성’을 강조해 왔다. 박찬욱의 개성은 어디서 나오나.



 “뭔가를 ‘한다’보다는 뭔가를 ‘안 한다’가 내게는 중요하다. 아주 다르고 새로운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남들 하는 걸 따라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한다. 어떤 평범한 장면을 찍을 때 굉장히 창의적인 앵글이나 카메라 움직임을 고안한다기보다 대개들 하는 방법을 피해가는 것, 그게 중요한 거다.”



●영화의 장르적 특성은 답습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것도 잘 써야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장르적 관습을 조금 좇는 듯하다가 결국 완전히 배신해 버린다든지 또는 아주 큰 틀에서만 장르의 성격을 따르고 세부에서는 다 벗어나 버린다든지 할 수 있다. 어떤 장르에서 좋아하는 점과 안 좋아하는 점이 있다면 좋아하는 것을 더 적극적이고 극단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거다. 예를 들어 ‘스토커’에서는 영화 전체에 교차 진행 크로스 커팅을 극단적으로 많이 썼다.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인데, 할리우드 상업영화·장르영화들이 발명해 즐겨 사용했고, 어쩌면 너무 많이 사용해 물려버린 기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관객을 흥분시킬 때, 또 나를 흥분시킬 때가 분명 종종 있었다. 그래서 시도했다.”



●오늘날의 영화세계를 구축하기까지 가장 영향을 준 텍스트는 무엇인가.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 모든 종류의 소설이다. 동서 추리문고가 나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엔 순수한 미스터리도 있었지만 Sci-fi나 하드보일드도 많이 있었다. 일반 소설이나 희곡들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나 생각할 시간은 많이 갖나.



 “원래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남동생과 방을 같이 썼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만의 방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최근 파주에 집을 짓고 나서 나 혼자 쓰는 방을 태어나서 처음 가져봤다. 혼자 있는 시간을 일부러 만드는 타입은 아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각본도 만들어야 하고, 생각하는 시간도 많이 가져야 하지만 나 혼자 생각하는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쓴다. 작가·조감독·촬영감독·미술감독·배우 등과 여럿이 혹은 일대일로 이야기하며 창작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대화 과정에서 발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게 영화감독이 시인이나 소설가와 다른 점인 듯하다. 나는 감독 중에서도 좀 더 그런 편이다.”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을 때 ‘이런 감독이 되겠다’고 목표했던 바가 있나. 지금 그 그림에서 얼마만큼 와 있나.



 “있는데 잘 안 지켜지고 있다. 영화를 빨리, 많이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안 된다. 내가 각본을 쓰기 때문이다. 구상해서 쓰고 수십 번 고쳐서 완성된 원고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좋은 작가가 써도 결국 내가 고쳐야 한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씩 생각하는 게 달라서다. 제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도, 이야기가 더 나빠지더라도 결국 내가 만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과정이 길어진다. 생각만큼 빨리 못 찍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으니 꿈꿨던 바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주어진 시간 안에 다 하진 못할 것 같고, 그러니 이미 반쯤은 실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갑자기 남이 쓴 각본을 받아다 내가 안 고치고 바로 찍어버리는 스타일로 바뀔 것 같진 않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이 좋다’는 평가가 있다. 스스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하나만 고르라면 명필름이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설 판권을 갖고 있을 때 감독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와 접촉을 시작했던 것, 그래서 그 영화를 내가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꼭 내가 만들어야 했던 영화도 아니었고, 당시 그렇게 인정받는 감독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게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방’이었던 것 같다.”



●그럼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도 ‘공동경비구역 JSA’인가.



 “‘박쥐’가 제일 잘 만든 것 같다. 제일 만족스럽다.”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떤가. 계속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고 싶나.



 “왔다 갔다 하고 싶다. 할리우드가 특별할 건 없다. 좋은 기획이라면 세계 어디서든 찍는 거다. ‘스토커’ 전에 먼저 하려고 했던 영화가 한 편 있다. 한국에는 ‘도끼’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액스(The Axe)’라는 작품이다. 투자 받던 중에 ‘스토커’가 들어와서 먼저 하게 된 건데, 일단 투자나 캐스팅에서 더 노력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써 놓은 각본이 있으니 잘되면 그게 다음 할리우드 작품이 될 것 같다.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 현대사에서도 다루고 싶은 이슈가 몇 개 있다. 가만히 보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가끔 계획은 세워서 뭐하나 싶다. 하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참 막연한 질문인데….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내 나름의 인생에 대한 교훈을 분명하게 표현한 영화라는 점에서 나에겐 참 독특한 작품인데, 거기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아주 확실히 말하는 게 하나 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거짓말에 속지 말고, 남에 의해 주입되는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실성 있게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절망하거나 죽어버려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힘내!’다. 결국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밥을 먹는다는 것’이라는 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주제였다. 밥은 먹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나의 답도 ‘밥은 먹고 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박찬욱 감독이 본 출연 배우들



니콜 키드먼 Nicole Kidman




“니콜은 악바리다, 한 번 테이크를 갈 때 카메라를 끄지 않고 세 번씩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 중간중간 헤어·메이크업 담당자들이 덤벼들어 고치고, 감독이 가서 ‘이번엔 좀 다르게 해보자’ 말하고, 조명 만지고 하는 자체를 싫어하고 한번에 해버리길 원하더라. 그래서 감독은 ‘액션’을 외치고 쇼트가 끝나면 ‘컷’ 대신 ‘리셋’을 외친다. 그러면 카메라를 켠 상태에서 모두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 감독이 다시 ‘액션’을 외치면 또 다른 강도, 또 다른 표현으로 다시 한 번 촬영을 한다. 니콜과는 대부분 그 1번의 시리즈에서 원하는 것이 나온다.”



미아 바시코브스카 Mia Wasikowska



“폴란드 태생의 호주인인데 내면적으로 굉장히 깊고 강인하면서도 차분하고 얌전하다. 현장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굴지 않고 전체와 타인을 배려한다. 한국으로 치면 임수정과 닮은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소탈하다. 평소에 길거리에 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 단순히 꾸미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보통사람의 삶을 살길 원한다. 연기할 때 보면 젊은 사람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참 표현을 적게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저렇게 연기를 안 해 버리나’ ‘왜 저렇게 가만히 있나’할 정도다. 그런데 그게 다 자기 계산이 있는 거다. 편집을 해 보면 가만히 있는 듯해도 다 감정을 가지고 있다. 조그맣게 눈을 깜빡이거나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거나 하는 식이다.”



매슈 구드 Matthew Goode



“매슈는 아마도 제일 놀라운 발견이 될 것이다. 니콜은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고, 미아는 어리지만 이미 업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에 비해 매슈는 아직도 정당한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과소평가된 상태다. 하지만 그가 주인공으로 악마적 매력을 발산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신사적이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한가 하면 병적이고 어둡다. 케리 그랜트와 앤서니 퍼킨스는 거의 모순에 가까운 두 배우가 아닌가. 그런데 매슈에게는 그 둘의 결합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꼭 코미디를 해 보라고 권했다. 만나는 감독들에게도 매슈 데리고 코미디 하라고도 추천하고 있다. 영국식 신랄한 유머센스에 타이밍 감각까지 기가 막히다. 완벽한 외모에 지성까지, 나무랄 데 없는 좋은 배우의 모든 것을 갖췄다.”



LA중앙일보=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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