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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안보려 안과의사 선택한 그가 학살자로…

30년간 시리아를 폭압통치했던 아버지에 이어 10년째 권좌를 유지하는 알아사드 대통령. [연합 뉴스]
어머니는 아들에게 종종 말했다.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우리가 이 지경은 아닐 게다.(If your father were still alive, we would not be in this mess.)”



[세계 속으로] 알아사드 대통령, 런던 안과의사서 시리아 학살자로
시리아 알아사드 가문

 그녀가 그리워하는 남편은 시리아를 30년간 폭압 통치했던 하페즈 알아사드(1930~2000년)다. 로이터통신 기자들이 쓴 중동 리포트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하페즈를 이렇게 묘사한다. “고집·권모술수·비타협·편협·계산적·정중·인내·집요·엄격·교활·영리·복잡·책략가·모호·권위적·냉혹·잔인·강인·냉담·탁월”(178쪽).



 어머니 아니사 알아사드는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지난해 3월 이후 반정부 시위자 8000명(유엔 추정)을 학살한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47) 대통령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실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은 3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 ‘아랍의 봄’은 튀니지와 이집트·리비아의 독재자를 연이어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세계의 눈은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40년 넘게 부자(父子)의 철권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시리아가 다음 차례가 되리란 기대였다. 그러나 바샤르는 안팎의 하야 압력에 강력한 무력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아버지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1982년 2월 하마 대학살이다. 하마는 하페즈 정권을 위협하던 무슬림형제단과 이에 동조하는 반정부 수니파의 거점이었다. 하페즈는 반정부 지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특수부대와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수주간의 공격으로 최소 1만7000명에서 최대 4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숨졌다.



 어쩌면 어머니는 지금 큰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페즈의 장남 바실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내정돼 1993년 공화국수비대 여단장에 오르면서 권부의 핵으로 착착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 바실이 94년 다마스쿠스공항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하페즈에게는 권력 승계가 급해졌다. 후계감은 삼남 마헤르였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냉혈한에다 욱하는 성격까지 갖췄다(마헤르는 훗날 매제 아세프 쇼카트와 대통령궁에서 언쟁을 벌이다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27세에 불과했다. 아사드 일가와 노회한 정치 엘리트들은 런던 병원에서 안과 의사로 근무 중이던 차남 바샤르를 서둘러 불러들였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재임할 당시 집무실엔 단 한 번 갔고, 정치 대화는 해 본 적도 없다.” 바샤르의 이 고백은 과장이 아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그는 “피를 볼 일 없고, 응급상황이 거의 없는”(2011년 3월 ‘보그’ 인터뷰) 안과 의사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내 아스마 알아사드(37)를 만난 것도 런던에서였다. JP모건의 투자분석가 출신인 세련된 여성 아스마는 조용하고 예의 바른 시리아 청년에게 끌렸다. 그녀의 부모가 시리아 제2의 도시 홈스 출신인 것도 두 사람의 교감을 도왔다.



 바샤르가 다마스쿠스에 와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홈스의 군사아카데미에 들어가 군사학을 공부했고 고속 승진 끝에 99년 공화국수비대를 지휘(육군 대령)하게 됐다. 2000년 하페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34세의 바샤르가 대통령에 추대됐다. 의회는 이를 위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위한 연령을 40세에서 34세로 낮추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바샤르는 육군사령관과 집권 바트당의 총서기 등 요직을 차례 차례 접수했고, 그해 7월 의회 투표에서 97%의 찬성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집권 초기 바샤르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서방 문물에 노출됐기 때문인지 정보통신 기술과 세계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광범위한 개혁도 약속했다. 취임 연설에서 경제를 현대화하고 부패를 추방하며, 시리아식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내각 개편을 통해 보수 원로 엘리트 대신 신진 테크노크라트를 대거 발탁했다. 수백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대중 정치집회와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다마스쿠스의 봄(Damascus Spring)’이다.



 하지만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초 정부는 각종 집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진보 성향 정치인들을 체포했고, 언론 자유를 제한했다. 비상통치 체제도 부활시켰다. 남아 있던 몇몇 경제 자유화 조치는 소수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시리아는 다시 동토(凍土)로 회귀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가장 주요하게 꼽히는 것이 바샤르의 권력 기반이 아직 여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로 정치엘리트들 눈엔 바샤르가 주도하는 변화가 달가울 리 없었다. 원로 엘리트뿐 아니라 바샤르의 가족도 바샤르로 하여금 야당과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도록 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어머니 아니사다. 아니사는 가족 안에서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바샤르의 남동생 마헤르(45)가 있다. 공화국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마헤르는 잔인한 강경론자로 꼽힌다. 전 레바논 총리 라피크 하리리 암살사건(2005년)도 그가 기획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아니사의 친정 쪽에선 라미 마클루프(43)가 대표적이다. 바샤르의 이종사촌인 그는 시리아 최대 갑부다. 통신·방송·금융·무역·건설 등을 아우르는 거미줄 사업망으로 시리아 경제의 60%를 주무른다는 분석도 있다(파이낸셜 타임스). 한마디로 바샤르의 가족이 정·관·재계와 군부의 요직을 장악한 가운데, ‘패밀리 파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에 무력을 불사하는 구조다.



 어머니 아니사는 아들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위키리크스). 그것은 70년 11월 하페즈 알아사드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접수한 이래 시리아를 장악해 온 집권 바트당·군부·알라위(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 삼각동맹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더한 학살로 대응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샤르는 지난해 12월 미국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시위대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을 재천명했다. “(반정부 시위대를) 죽이거나 잔인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나는 그들(군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나 개인의 병력이 아니다.” 그는 “나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도 했다.



 ‘다마스쿠스는 왜 카이로가 되지 못하는가’.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지난해 3월 이런 제목의 기사에서 바샤르 체제를 유지케 하는 구조를 분석했다. 첫손에 꼽힌 것이 알아사드 일가를 중심으로 한, 소수에 의한 극단적 권력과 부의 집중이다. 튀니지·이집트·리비아에서 엘리트 계급과 다수 민중이 1% 대 99%라면, 시리아에선 0.1% 대 99.9%다. 특혜층이 워낙 극소수라 다수 기층민은 격차를 실감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바샤르가 인기 없긴 해도 반정부 세력이 더 인기 없는 것도 문제다. 시리아 국민은 74%가 이슬람 수니파다. 알아사드 가문이 속한 알라위파는 10% 정도다. 아랍의 다른 독재자와 달리 종교적 소수파에 기반한 바샤르는 종파 분리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으로 비쳤다. 게다가 이들이 틀어쥔 집권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다.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의 투쟁이 시리아 국민에게 ‘민주화 투쟁’으로 읽히기보다 종교 분쟁을 조장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가족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돼요. 각자가 원하는 곳에 투표하죠.” 패션지 ‘보그’ 인터뷰에서 바샤르의 부인 아스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스마는 대통령궁 바깥에서도 그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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