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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기자의 문학사이 ⑦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장석남
지난 칼럼(1일 20면)에서 예고했던 대로 오늘은 장석남 시인 특집입니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운운하며 장 시인의 신작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를 추천했었지요.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장석남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한 극점입니다. 위로는 미당(未堂) 과 백석이 있었고, 옆으로는 문태준 시인이 나란히 걷고 있지요. 장 시인과 문 시인을 하나로 이으면 최근 한국 서정시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가 무엇입니까. 시인의 마음 풍경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시인의 기본기 같은 것입니다. 음악으로 치자면, 발라드라고 할 만 하지요.

가수의 가창력이 매끈한 발라드에서 결판나듯, 시인의 깊이도 서정을 다루는 솜씨에서 결판날 수 있습니다.

 장석남 시인은 서정을 다루는 솜씨로는 단연 프로입니다. “애초에 시로 태어난 자”라고 불릴 정도로, 시적 감각이 유별난 편입니다.

그 감각은 그의 질기디 질긴 기다림이 길러낸 것이지요. 문태준이 서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시인이라면, 그는 서정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인입니다. 고요한 가운데 시적 대상을 바라보다, 제 마음에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시를 적어 내려갑니다.

 ‘한밤/물미역 씻는 소리는/어느 푸른 동공(瞳孔)을 돌아나온 메아리 같네/…//한밤에 찬장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아는가?/밥 위에 내려앉는 백열등 불빛을 아는가?//울음 세 개 간직한/물미역 씻던 손’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에서 고른 ‘물미역 씻던 손’이란 시입니다. 누가 있어 저런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서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누구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소리에, 제 마음을 전부 내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건너편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누군가 물미역을 씻고 있습니다. 밤은 깊어 모두들 잠들었는데, 홀로 미역을 씻는 손이 시인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울음 세 개 간직한’ 그 손. 누가 있어 그 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서정시에선 그렇습니다. 많이 감각하는 자가 이깁니다. 장석남 시인은 고요하게 기다리고, 고요하게 감각하여 시를 짓지요. 그러니까 고요란, 그의 유일한 시작(詩作) 전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는 서정을 기다리는 그의 절박한 호소일 테지요.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저물녘-모과의 일’)

 올해는 장 시인의 등단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뭐니 뭐니 해도 내 생에서 시경(詩境)으로 출타한 것이 인생의 큰일”이라고 적었는데, 그에게는 큰일이겠지만 한국문학에는 축복임에 틀림 없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장석남이 없다면 한국 서정시가 휘청입니다. 그는, 도망가지 말아라, 저 아름다운 시경(詩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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