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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뉴욕의 통미봉남?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우리의 새 지도자는 이전 세대와 달리 미국과의 다툼을 원치 않습니다. 평화를 원합니다.” “미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핵우산을 제공하면 당장이라도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용의가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악(惡)의 축, 불량국가, 독재국가, 범죄국가로 간주하는 한 우리가 어떻게 미국에 대한 위협을 안 느끼겠습니까?” “미국이 수교하지 않은 네 나라는 부탄·이란·쿠바, 그리고 우리뿐입니다. 부탄은 스스로 수교를 원치 않았고, 이란과 쿠바는 수교를 했다가 단교(斷交)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세계대전을 치른 독일·일본과도 수교하면서 유독 우리에게만은 적대적으로 대해 왔습니다.” “미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선입견의 마인드 셋을 고치지 않는 한 조·미 관계 개선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파격. 지난주 미국 뉴욕에서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미국 시러큐스대 맥스웰스쿨, 그리고 한신대 평화와 공공성 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동북아 평화안보 국제회의’에서 북측 대표들이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느꼈던 필자의 첫 소감이다. 북한 대표들은 미국이 북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끝내고 제재 철회와 국교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전향적으로 나선다면 핵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마디로 그간 워싱턴이 견지해 왔던 ‘선 비핵화, 후 정상화’ 구도의 순서를 바꿔달라는 주문이다. 강대국 미국이 먼저 통 크게 포용에 나서면 평양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새로 출발한 만큼 그에 맞춰 ‘새로운 외교’를 하자는 게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반면 미국 측의 반응은 여전히 견고했다. ‘마인드 셋’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인 미국에서 정부가 정치인들의 대북 인식을 좌지우지할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 워싱턴 내에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런 급반전을 기대하겠느냐는 게 미국 측 인사들의 반문이었다. 9·19 공동성명에서 비핵화에 합의해 놓고도 두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북한을 신뢰하자고 주장하며 ‘통 큰 조치’의 총대를 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다. 결정적으로 북·미 수교나 평화조약 체결에는 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이지만, 북한 측이 전향적 조치를 먼저 취하지 않는 한 의회 설득은 어렵다는 설명도 나왔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비핵화와 관련해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진전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몇몇 언론이 현장 분위기를 보도한 바 있지만, 회의 기간 북측 대표단이 남측 정부 대표를 보는 시각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필자가 대놓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에는 그토록 노력하면서 남측과의 대화는 왜 회피하나.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북한이 얻을 게 뭐냐”고 따져 묻자, 북측 대표의 답변은 명확했다. 북·미 관계가 모든 문제의 ‘관건적 요소’이므로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남북 관계나 북·일 관계 모두 개선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이들은 통미봉남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자신들은 ‘통미통남’을 원하지만 남이 스스로 봉남을 자초하고 있다는 역공이었다. 서울이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의 준수, 5·24 제재조치 중단을 선언하고 그에 따라 교류협력 강화에 나선다면 자신들도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따라 나왔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남북 경색의 가장 큰 이유를 “이명박 정부의 이중적 태도 탓”으로 돌렸다. ‘남측은 미국과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고 26년 만에 상륙작전 연습까지 진행하는데 우리 군은 어찌 가만히 앉아 있겠나. 그래서 비상경계에 들어간 건데 이를 두고 마치 도발의 징후처럼 각색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속내도 나왔다. 특히 자신들의 ‘최고 존엄’인 김정일·김정은 부자에 대한 모욕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 반복됐다. 책임은 “한편으로는 대화하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발하는 남측의 이중적 태도”에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남측과의 대화에 나설 수 없다”며 북측 인사들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평양이 새 지도자의 등장과 함께 외교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추진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최근의 북·미 대화 분위기가 한반도 정세의 극적인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 이유다. 워싱턴의 마음은 여전히 냉정하고, 한국 정부가 강조해온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 재개’의 3단계 구상도 그 전도(前途)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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