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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걸출한 삶,그 안에 배어있던 처절한 가난의 상처

소설가 이청준의 2006년 모습. [사진 중앙포토]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은 나의 추억 속에 깊이 각인돼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4·19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 서울대 문리대에 함께 입학했고, 그해 한 해 동안 교양과정부의 한 클래스에서 공부했다. 그 첫 해 이청준에 관한 기억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영·불·독문과 신입생 60여 명이 들끓어 늘 시끄러웠던 그 반에서 그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본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기도 한 데다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아 스스로 어울리기를 꺼렸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학년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전남 장흥 태생인 이청준은 같은 전남 출신인 김승옥(순천)과 김현(진도), 그리고 서울고 출신 동기생들인 박태순·김주연·김광규 등과 자주 어울리면서 문학 토론 따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9> 이청준의 장인(匠人)정신

이청준 자신이 술회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까지만 해도 문학이나 소설은 그저 취미일 수는 있어도 직업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겪어온 극심한 가난,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 그 가난 때문에 병든 막내 동생과 큰형이 치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잇따라 죽은 가족적 비극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다. 그에게는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에는 문학은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설 쓰는 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65년 이청준은 마침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퇴원’이 당선해 등단한다. 그 무렵 그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휴학 중이었다.

입학한 지 6년 만인 66년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한 이청준에게 주어진 과제는 ‘서울 사수(死守)’였다. ‘이 자랑스러운 도시의 시민이 되고자 6년 동안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초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서울에 늘어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상계’의 편집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 월간여성지 ‘여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뒤이어 종합월간지 ‘아세아’와 ‘지성’, 그리고 75년 문고판 월간문예지 ‘소설문예’까지 그가 거쳐간 잡지는 대여섯 개에 이르지만 그는 어떤 잡지에서도 1년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한데 그가 거쳐간 잡지들은 그가 퇴직하기만 하면 이내 폐간되곤 해서 친구들 사이에선 “청준이를 채용하는 잡지는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내가 이청준을 자주 만난 것은 그가 ‘소설문예’ 주간 일을 보던 75년이었다. 그의 사무실이 중앙일보와 가까운 옛 대한일보 빌딩에 있었고, 그가 나에게 ‘소설 월평’을 쓰게 해 그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만났다. 이따금 다른 친구들이 합석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단둘이 만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기 집안의 내력이라든가 자신의 성장 과정 따위에 대해서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들을 비슷한 소재의 소설들에 대입시키면 그가 성장 과정에 겪은 비극적이며 혹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용해돼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령 ‘키 작은 자유인’이나 ‘눈길’ 같은 작품들이다.

소설 속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정확하게 짚어낸 친구가 김현이었다. 84년 이청준이 연작소설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첫 편을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주로 대학 동기생들인 문인 친구들 몇이서 술판을 벌였다. 모두 거나하게 취했을 때 김현이 이청준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를 팔아먹다 팔아먹다 바닥이 드러나니까 이제는 다시 제 돌아가신 아버지를 팔아먹기 시작했더구먼.” 물론 술자리에서의 악의 없는 농담이었지만 이청준은 끝내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청준은 90년 김현이 타계한 직후 ‘가위 밑…’ 연작이 포함된 소설집을 출간하면서 후기에서 ‘작품을 발표하거나 책을 낼 때마다 이런저런 농조로 먼저 격려와 위로를 보내오던 친구’ 김현의 이른 죽음을 몹시 애달파 했다.

이청준은 상금 규모가 큰 ‘호암상’ ‘인촌상’을 비롯해 동인·이상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서편제’ ‘천년학’ ‘밀양’ 등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돼 큰 성공을 거두는가 하면 한양대 등 몇 대학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소설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누린 셈이다. 하지만 그로써 그가 어렸을 적 겪었던 가난과 비극이 말끔히 가셔졌을까. 모르긴 해도 극복됐다면 그것은 그런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얻어진 ‘장인정신’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는 소설 ‘이상한 선물’도 그의 장인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7년 여름 이근배는 새 계간문예지 ‘문학의 문학’ 창간을 서두르면서 이청준에게 소설 청탁을 한다. 이청준은 흔쾌히 쓰겠다고 약속하지만 바로 그 무렵 폐암이 발병한다. 일단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음을 알리지만 압박감에 시달렸는지 병상에서 작품을 쓴다. 마감도 넘겨 가까스로 실린 그 작품이 이근배에게는 말 그대로의 ‘이상한 선물’이 된 것이다. 이청준은 그로부터 꼭 1년 뒤인 2008년 7월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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