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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북돋워 助氣, 굽히지 않아 屈非

뉴스를 들으니 국민 대다수가 명절 선물로 받고 싶은 것 중 첫 번째는 굴비라 한다. 이런 배경에는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흔한 것이 굴비였기 때문에 평상시 먹던 굴비에 대한 향수가 짙게 깔려 있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기(助氣, 원기를 돕는 생선이라는 뜻)·석수어(石首魚)·세린석수어(細鱗石首魚)·선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남중국해)에서 겨울을 난 다음 2월께부터 산란을 위해 서해안을 따라 서서히 북상한다.

김상보의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본 제철 수라상 <14> 조기

2월 하순께 흑산도 연해, 3월 초순께 칠산바다(칠산도가 있는 전남 영광군 앞바다), 4월 중순께 위도(전북 부안군에 위치한 섬)에 이르러 산란을 시작한다. 수온이 높아짐에 따라 차츰 북상해 충남 태안반도를 지나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 사이 연평도 근해 어장과 백령도 어장을 거쳐, 6월 상순께에는 평북 압록강 퇴화도 어장에 이른다. 6월 하순께에는 발해만에 도달해 산란을 완전히 끝마친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산란을 위해 위쪽으로 갔다가 월동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광범위한 어장을 형성하는 회유 어종이 조기다. 부화된 조기 새끼들도 9월께에는 황해 중심의 서해안으로 내려온다.

그래서 3월 초순께의 칠산어장 조기는 알이 실하게 찬 것으로 곡우사리 파시(波市)를 형성했다. 청명과 입하 사이 즉 양력 4월 20일이나 21일 곡우가 들 무렵에 잡히는 조기를 곡우사리라 한다. 파시란 해상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이다. 연평도어장 조기는 알이 더욱 굵어지는 대신 살이 빠진 입하사리 파시를 형성했다.『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鎖錄)』(1895.2~1897.5)에 나타난 칠산어장을 보면 당시 이미 거대한 곡우사리 파시가 형성되고 있었으며, 중선 배로 멀리 떨어진 섬에까지 가서 조업했음을 보여준다.
“법성의 서쪽 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서쪽 바다는 망망대해로서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가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 파는데 오고 가는 거래액은 가위 수십만 냥에 이른다.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조기다. 고기 잡는 배는 100여 척이고, 상선은 수천 척이다….”

칠산어장에서 잡은 조기는 영광(靈光)으로 가져와 판매됐다. 생물로 팔려나갔지만 그 수가 너무도 많아 팔리고 남는 것은 말려 놓고 일년 내내 두고 먹는 것이 굴비였다. 뾰족하게 올린 지붕의 윗부분을 잘라 통기구멍을 만들고 경사진 지붕 안쪽에 조기를 촘촘히 매달아 바닥에 숯불을 피워 놓은 다음 바닷바람에 서서히 햇볕은 일절 쪼이지 않은 채 말리는 것이다. 알이 배 속에 가득 차 있는 말린 조기 굴비는 굽지 않고 생것을 그대로 찢어먹어도 일품이었다. 저장할 때는 통보리 속에 넣었다. 이것이 전통 영광굴비 만드는 법이다.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때 李씨가 임금이 된다는 소문 때문에 쫓겨난 이자겸(李資謙)은 영광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영광에서 진공하는 굴비에 ‘정주굴비(靜州屈非)’란 네 글자를 붙여 진공케 했다. 정주는 영광의 옛 지명이다. 영광에서 꺾이거나 비틀어지지 않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정주굴비’를 통해 알리고자 했다. 그 후 조기 말린 것을 굴비(屈非, 仇非, 仇乙非)라 했다는 이야기다.

구워 먹는 굴비의 맛은 너무도 좋았다. 조선 왕조에서도 조기와 굴비 양쪽 다 백성에게 진공케 했다. 구이용 굴비(仇非石首魚)는 전라도의 부안·옥구·흥덕·고부·만경, 충청도의 해미·덕산·은진·평택·비인, 황해도의 장연에서, 석수어는 전라도의 고부·무안·나주·영광·옥구·함평, 충청도의 당진·한산·석성·임천·직산, 평안도의 안주·영유·정주·중화·평양, 황해도의 해주·신천·연안·장연에서 올렸는데(『여지도서(輿地圖書)』, 1757), 이들은 물론 궁중 사옹원에서 탕·구이·조림으로 조리됐다.

저자가 의관(醫官)일 것으로 추측되는, 1750년을 전후해 쓰인 『수문사설』에는 1720년 병약한 경종대왕에게 조기죽(助氣粥)을 쑤어 올려 드시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강나게 간 쌀에 물을 넣고 뭉근한 불에서 끓이다가 다진 조기살을 덩어리가 지지 않게 개어 넣고 쑨 죽이다. 경종대왕의 원기를 돕고자 했을 것이다.어쨌거나 수분이 풍부하고 담백해 말리면 전혀 ‘쩐내’가 나지 않으면서 독특한 감칠맛이 있어 사랑을 받는 조기는 남획과 어장 환경의 오염, 그리고 불법 어업 등이 가세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저한 고갈 현상이 생겨났다. 현재는 동중국해에까지 가서 잡아야 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서해바다에서 넘쳐나게 잡혀 굴비도 만들고, 그것도 남아 조기젓을 담가 먹었던 그 시절은 이제는 머나먼 옛일이 돼버렸다. 웬만한 크기의 굴비 한 마리 값이 2만원이다. 조기젓은 아예 자취를 감추어 황석어젓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한양대 식품영양학 박사.『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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