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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임기 말 불청객 ‘양심선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2년 전 톱뉴스였던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이명박(MB) 정권 임기 말을 맞아 다시 불거졌다. 당시 사찰을 담당했던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하급직 실무관련자인 장진수 주무관이 지난 주말 인터넷 오마이뉴스 팟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다소 어눌하면서도 긴장된 목소리였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작심한 듯 핵심적인 대목을 폭로했다. 충격적인 대목은 ‘사건의 배후는 청와대’라는 주장이다. 그는 “청와대 행정관의 지시를 받고 사찰 담당 공무원들이 사용했던 컴퓨터의 자료를 파기했다”고 밝혔다. 사건 당시 연루 의혹이 제기됐던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종석 행정관이 연결고리로 지목됐다. 최 행정관은 2년 전 장 주무관에게 대포폰을 주었던 인물로 확인돼 당시에도 의심을 받았었다.

 최 행정관은 수사 과정에서 무혐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대사관에 근무 중이다. 최 행정관은 장 주무관이 감추어준 덕분에 무사했던 셈이다. 장 주무관은 당시 “최 행정관이 평생 먹여살려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기에 ‘의리’를 지켰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와 털어놓는 이유에 대해서는 “진실 고백이 국가공무원으로 국민에 봉사하는 마지막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심선언이란 주장이다.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짜고 치는 검찰’이다. 최 행정관이 ‘컴퓨터를 한강에 버리라’고 지시하면서 망설이는 장 주무관에게 “민정수석실과 얘기 다 돼 있다. 검찰이 컴퓨터가 없어도 문제 안 삼기로 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최 행정관은 검찰의 압수수색을 미리 알려주었고, 실제로 검찰의 압수수색이 허술했으며, 최 행정관과 관련된 서류는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오지도 않았다는 등등.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불법 사찰은 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 일부의 과잉 충성과 권력 남용에 불과했다. 그런데 장 주무관의 주장에 따르면 사건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청와대가 불법을 지시했고, 범죄 사실이 드러나자 증거인멸까지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엄정한 법 집행을 해야 할 검찰까지 불법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공무원 비리가 아니라 정권 차원의 범법행위인 셈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장 주무관의 고백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양심선언이라고 하지만 2년 전엔 감추었던 말 바꾸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주무관의 주장은 치명적이다. 사실이라면 국기(國基)를 흔들 수 있는 중대 범죄에 대한 고발이다. 재수사가 필요한 이유다.

 청와대는 일찌감치 불법사찰 배후로 의심받아 왔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란 기구 자체가 청와대의 하명(下命)을 수행하는 특수조직으로 만들어졌고, 사건 당시부터 ‘청와대 지시’라는 메모가 들어간 문서가 확인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에 대해서도 축소·늑장 수사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장 주무관의 양심선언은 이런 국민적 의혹에 불길을 댕긴 셈이다.

 이번 사건은 여러모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연상케 한다. 아주 사소한 일로 시작됐지만 은폐 과정에서 더 큰 불법이 저질러졌다면 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심각성을 안고 있다. 닉슨이 사임한 이유는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보다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거듭된 대통령의 거짓말과 무리수다. 더 근본적으로는 닉슨의 잘못된 정치철학이 깔려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한 좀도둑 사건으로 시작됐다.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 대통령 진영은 ‘우리와 전혀 무관’이란 입장을 밝혔다. 도둑들에게 백악관 돈이 흘러간 사실이 확인되자 닉슨은 “나도 모르게 부하들이 저지른 과잉충성”이라고 거짓말했다. 닉슨은 법원의 명령에 따라 제출한 녹음테이프의 핵심 대목을 삭제한 사실이 드러나자 “우연한 실수”라며 다시 거짓말을 했다.

 닉슨은 숨질 때까지 ‘억울하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참모였던 데이비드 거건에 따르면) 닉슨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야비한 방법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소신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는 권력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마키아벨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닉슨은 외교나 경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면에선 미국 유권자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묵었던 의혹사건이 다시 불거지는 것을 보면 임기 말이 실감난다. MB의 정치철학이 닉슨을 닮았을까 걱정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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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