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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3·1운동 1년 후

이덕일
역사평론가
1919년 9월 2일 신임 총독 사이토 마고토(齋藤實)가 부임하러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만 64세의 청년 노인 강우규(姜宇奎)가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와 함께 부임했던 아카이케 아쓰시(赤池濃) 총독부 경무국장은 “경찰의 신용은 떨어져 있었고, 인원도 부족했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이날 사방이 어두워졌는데도 총독부에 전등을 켜지 않아 “알고 보니 점등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사기는 뚝 떨어졌다”고 했다. 아카이케는 “감옥 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고, 이전까지 친밀했던 사람조차 일본인과는 소식이나 왕래가 끊어졌다”며 “민족자결, 조선독립, 조선자치라는 말이 왕왕 제창됐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직접적으로 강 의사의 폭탄 의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근본 원인은 그해 3·1운동이었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대한 자신을 잃고 있었다. 친일 경찰 김태석(金泰錫)이 강 의사를 체포해 무너져가던 일본 경찰을 살렸지만 일제는 1920년 3·1운동 1주년이 다가오자 극도로 긴장했다. 이날 다시 시위가 발생하면 독립기념일이란 선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치안 사건을 담당했던 지바료(千葉了)는 『조선통치비사(朝鮮統治秘史)』에서 “1920년 3월 1일 1000여 명의 경찰관을 경복궁 문 앞으로 집합시켜 조련한 후 종로 거리를 행군시키고 경비대 및 소방대도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경찰들이 가두시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 3·1운동 1주년은 조용히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 만세시위를 벌였다. 놀란 일제는 서대문경찰서 경찰관 100여 명 전원을 출동시켜 학교를 포위하고 교장 아펜젤러에게 주동 학생 인도를 요구했다. 교장이 거부하자 200여 명의 학생을 밤 12시까지 전원 조사해 10여 명을 교장과 학부모들의 면전에서 연행했다.

 지바는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외국보다 일본 통치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조선인에게 자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이 특기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 정무통감(政務統監)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아펜젤러를 해임시켰다. 감리교 웰치 감독(監督)의 항의를 받은 사이토 총독이 학무국장에게 해임 취소를 명령했으나 불복했다. 아마도 총독부 내에서 총독의 지시를 거부한 유일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학생 200여 명의 교내 시위에 화들짝 놀라 1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3·1운동 때 이미 한국인은 물론 식민 통치자들의 가슴속에서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음을 말해준 사건이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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