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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봄꽃

이덕일
역사평론가
봄꽃을 연화(煙花)라고 한다. 안개(烟) 속에 피는 꽃(花)이란 아지랑이 속에서 피는 꽃을 뜻하리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상춘오수(傷春五首)’에서 나온 말인데, “천하에 전란은 가득 찼어도/ 봄볕은 날로 짙어가네/ 서경(西京·서안)은 끝없는 전쟁에 피로한데도/ 대궐은 흉한 무리들이 차지했네/ 관새(關塞·변방요새) 삼천리에는/ 연화가 일만 겹으로 피었네(天下兵雖滿/春光日自濃/西京疲百戰/北闕任群凶/關塞三千里/煙花一萬重)”란 시다. 전란 속에서도 봄꽃은 피어난다는 애상(哀傷)을 노래한 시다.

 연화는 새 왕조의 일어남을 뜻하기도 한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동경(東京·경주)에 살던 동경노인은 새 왕조를 거부하고 숨어버렸다. 조선 후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고려 성종(成宗·960~997)이 경주로 순행해 숨은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신라에 대한) 충효를 기리자 동경노인이 나타나 내상(內相) 왕융(王融)에게 시 3편을 전했다고 전한다. 그중 “잎이 누런 계림은 이미 쓸쓸하게 저물었고/ 연화가 지금 상림원(上林園·임금의 정원)에 다시 피니 봄이로구나(黃葉鷄林曾索莫/烟花今復上園春)”라는 구절이 있었다. 누런 황엽과 계림은 신라를 뜻하고 연화는 고려를 뜻하니, 비로소 고려가 천명을 받아 개창한 것을 동경노인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안정복은 이를 성종 16년(997)의 일이라고만 기록하면서 동경노인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최치원(崔致遠) 열전’은 최치원이 고려 태조가 천명을 받을 것을 알고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지어 왔다고 적고 있다. 누런 황엽 계림은 곧 망할 신라이고 푸른 소나무 고려가 들어서리라는 뜻으로서 안정복은 최치원을 동경노인이라고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최치원을 제향하는 경주 서악동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대한 ‘서악지(西岳誌)’를 쓰면서 “(최치원이)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을 가지고 은밀히 고려의 왕업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의 식견이 좁아서 그렇게 전해진 것”이라면서 동경노인은 최치원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지랑이 속에 피어오르는 봄꽃 한 송이, 누런 나뭇잎 하나로 왕조의 흥망성쇠까지 노래한 선조들의 식견이 놀랍다. 여야 간에 공천경쟁과 선거전이 치열한데 과거 황엽으로 지던 세력이 봄꽃인 양 부활하고 과거 봄꽃으로 자부했던 세력이 황엽인 양 수세에 몰리는 것을 보면 인간사도 자연의 이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누가 봄꽃으로 필지는 봄꽃 피는 사월이면 알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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