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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이영일] 타이베이(臺北)에서 사라진 장제스(蔣介石)의 꿈

1.

타이베이의 2월은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는 우기(雨期)였다. 햇볕 아래서는 반팔을 입어도 덥지만 구름이나 가랑비에 햇볕이 차단되고 바람이 불어오면 온도는 급강하, 대기 속에서 한기(寒氣)를 느낀다. 한중문화협회는 그간 정책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양안관계연구의 일환으로 작년 6월에는 중국국제우호 연락회와 제휴, 제3차 한중민간우호포럼을 중국과 타이완간의 교류 현장인 샤먼(廈門)에서 개최하고, 그간 양안관계 발전상황을 고찰하였다. 이어 금년에는 오늘의 타이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아울러 금년은 한중문화협회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임을 감안, 오래 동안 협회의 협력파트너였으나 한중수교 후 관계가 소원(疏遠)해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로부터 협회 창립70년사 정리에 필요한 자료협력도 받아볼 양으로 금년 제1차 중국방문지로 타이베이를 택했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와 관계가 멀어진 타이완의 중한문화협회는 타이완?한국경제문화기금회(基金會)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이 주한(駐韓)타이완 대표부의 전언이었다. 한중문화협회가 한중수교 후 하나의 중국원칙 때문에 타이완의 민간단체 아닌 국가기관으로서의 중한문화협회와 공식협력을 자제한 때문이었다.



필자는 1982년 제11대국회의원 시절 몇몇 한국국회의원들과 함께 타이완을 방문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만 30년만의 방문이었다. 물론 필자가 한중문화협회 회장이던 1999년 타이완의 타이중(臺中)에서 대진진이 일어났을 때 협회는 제 아내를 포함한 10인의 대표단을 구성, 타이완을 방문하고 재해의연금으로 1만 달러를 중한문화협회에 전달한 바 있다. 이것이 중한문화협회와의 마지막 공식협력이었다.



2.



오늘의 타이완은 30년 전과는 판이했다. 물리적 외관이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타이완 사회를 유지하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우선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대륙을 수복하려는 광복기지가 아니었다. 한국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대륙광복설계위원회나 이 목적에 복무하던 정치작전학교는 그 간판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우선 도착당일 느낀 일이지만 타이베이공항의 명칭이 장제스(蔣介石)의 호를 딴 중정(中正)공항에서 타오위안(桃園)공항으로 바뀌었다. 장총통의 중정기념관은 “타이완 민주기념관”으로, 대중지정(大中至正)광장도 “자유의 광장”으로 아름이 바뀌었다. 2008년 천수이비엔 총통이 내린 조치였다.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사망했을 때 그를 따라왔던 국민당원과 군인들은 친부모를 여읜 것보다 더 설게 울었다지만 이제는 지도자로서의 장제스 한 사람만을 우러러 보던 시대는 끝났다. 장제스는 생전에 한 번도 중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의 군사적 패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군대의 타이완 이동을 “공간으로 시간을 벌겠다는 전략원리”를 쫒는 작전상의 철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타이완은 대륙광복을 위한 기지였을 뿐 그 지역을 본토로 부터 분리해서 독립한다는 생각은 아예 존재치 않았다.

그는 죽을 때 까지 국부 쑨원(孫文)이 세운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자기를 정의했다. 물론 1972년 미국과 중국 간에 샹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임을 미국이 인정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그 내용이 통일을 꿈꾸는 장제스의 철학과 원칙 면에서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엔에서 중국대표권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장제스의 꿈은 사라졌고 그의 시대도 끝장났다.



유엔과 그 전문기구에서 모든 지위를 중국에게 빼앗긴 타이완은 국제무대에서 완전 고립되었다. 타이완과 단교 없이는 중국과의 수교의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고궁박물관의 귀한 문화재나 자연경관의 어느 것도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 없게 되었다. 40여개가 넘게 몰려오는 태풍에 이름 붙일 권한도 없어졌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그러나 처지는 변했지만 놀라지 않는다(處變不驚)는 입장을 타이완은 견지하고 있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 직을 세습하면서 대만의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아시아의 4 룡(龍)의 하나로 타이완을 위치지우는 발전의 역사를 이루었다. 타이완의 동(東)과 서(西)를 잇는 도로를 굴착 하면서 자연자원을 이용한 관광산업(타이루코(太魯閣)협곡 등)을 일으키고 낙후지역 개발, 서민생활수준의 향상, 기업입국의 토대를 구축하는 등 타이완이 자립(自立) 자전(自轉) 자활(自活)할 수 있는 발전의 문을 열었다.



또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들어온 수많은 노병(老兵)들의 소원인 고향방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중국과의 대화의 문을 연 것도 장징궈의 큰 업적이다. 지금도 타이완의 주민 여론조사에서 장징궈 총통이 장제스의 지지도 10%보다 훨씬 높은 50%대의 지지를 받는 것도 그가 세운 타이완 발전에 대한 기여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장징궈 총통은 그가 죽기 전에 “장씨(蔣氏)가문의 정치는 나로서 끝낸다.”면서 세습정치를 포기했다. 뒤이은 총통은 국민당의 리덩휘(李登輝)였으며 타이완 태생의 리 총통은 총통제를 주민직선제로 바꾸고 1996년 타이완 역사상 처음 실시된 직선에서 민선총통에 당선되었다. 장징궈의 세습 포기결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는 평도 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후손에로의 권력세습이 동양정치의 전통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적이다.



3.



리덩휘 이후 민진당(民進黨)의 타이완 출신의 천수이비엔(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됨으로 해서 당대당간의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천수이비엔은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이라는 표퓰리즘적 공약은 중국의 강한 반발, 특히 통일을 위한 무력공격의 법제화라는 강공을 받았고 미국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이 결과 2009년 총통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승리했고 마 총통은 2012년 1월에 실시된 총통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그러나 한족(漢族)출신의 국민당이 민진당을 누르고 재집권했지만 장제스가 갈망했던 통일광복의 꿈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마잉주(馬英九)총통은 중국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양안간의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이른바 3불 원칙을 내세워 통일을 당면 국가목표에서 제외했다. 마 총통의 3불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不統), 독립을 시도하지 않으며(不獨),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不武)를 말한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의 눈에 띈 장제스의 유산(遺産)은 경제발전의 큰 업적을 제외한다면 사림관저(士林官邸)로 표시된 장제스 부부가 살던 사택과 민주기념관에 비치된 장제스 관련 자료, 장제스가 중국본토수복의 꿈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중국본토 도시들의 명칭을 따 붙인 타이베이 시가지의 도로 표지판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공직자부패 때문에 본토를 잃은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부패한 공직자를 국적(國賊)으로 엄히 다스리게 한 형법이 그대로 살아 있어 부패혐의로 구속된 전 총통 천수이비엔은 1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웅 장제스가 그리던 통일 광복의 꿈은 사라졌고 G2로 커져버린 중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생존을 추구하는 타이완의 새로운 현실이 앞날의 역사를 채워나가고 있다.



2008년 마잉주 대만 총통 취임 이후 양안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주변국들과 타이완의 교류도 급증하고 최근 일본은 타이완과 투자보호협정을 맺었다. 이런 새로운 정황을 피부로 느끼는 주 타이완 한국대표부는 한국도 타이완과의 관계를 양안관계의 변화에 맞게 잘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3박4일 동안 타이베이와 타이완의 일부지역을 돌아보면서 실패한 지도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타이완에 대한 정책목표가 뚜렷치 못한 현실이 귀로에 오른 필자의 마음을 마냥 무겁게만 했다.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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