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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老작가의 미친 창작 에너지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Kusama Fashion, New York’(1970) Photo by Thomas Haar /‘Eyes of Mine’(2010)/‘I’m Here, but Nothing’ (2000/2012) Photo by Lucy Dawkins/Tate Photography /‘Infinity Mirrored Room-Filled with the Brilliance of Life’(2011) Photo by Lucy Dawkins Tate Photography

2월 7일 런던 테이트 모던 뮤지엄 기자회견장에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가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여든세 살의 구사마가 과연 비행기 여행을 감행하고 런던에 올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조수들 도움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은 구사마가 기자들에게 답례를 하며 포즈를 취했다. 빨간 가발에 하얀 폴카 도트가 들어간 빨간 드레스를 입은 구사마의 얼굴에서는 여든이 넘는 나이도, 대양을 가로지른 시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9일부터 6월 5일까지 테이트 모던에서 열리는 구사마 야요이 회고전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Reina Sofia) 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거쳤고, 다시 미국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나는 이미 퐁피두 전시를 보았지만 이번 테이트 모던 전시를 통해 구사마의 작가로서의 일생에 다시 한번 깊은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테이트 모던 회고전은 처음 작품활동을 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삶과 작품이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창조돼 왔는지 잘 보여주었다.

테이트 모던 수석 큐레이터 프랜시스 모리스는 “이번 전시는 4개 도시 순회전 중 가장 규모가 크다”며 “전시 공간이 가장 크고, 여러 뮤지엄과 개인 컬렉터로부터 빌려온 작품 수도 가장 많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개인전도 함께 여는 구사마 야요이를 갤러리에서 직접 만났다. 일본어가 유창한 영국인 통역과 함께 앉아 있던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눈빛만은 매우 또렷했다.

“2003년 아트선재센터 전시 이후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졌다”고 했더니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로 답례를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당신은 나의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어 구사마는 장거리 여행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12년 전 런던 서펀타인 갤러리에서 있었던 회고전 이후 처음 있는 유럽행이었다. 오랫동안 여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구사마는 “그동안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내겐 시간이 제한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제한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방가르드에 빠진 1957~73 뉴욕 시기

구사마 야요이는 1929년 나가노현 마츠모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구사마는 화가가 되길 소망하면서 열 살 때부터 그림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들의 패턴이 실제 생활로 확대되는 환각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러한 그녀의 정신적인 질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빼앗아버렸다.하지만 그녀에게 그림은 자신의 환각을 표현함으로써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녀는 결국 집을 떠나 교토에서 일본 전통 회화인 니혼가를 공부했지만 대학 졸업 후에는 니혼가의 전통과는 상반되는 추상화에 몰두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작업의 주된 모티브로 사용되는 폴카 도트나 추상적인 곡선,초현실주의적 느낌을 주는 꽃의 반복되는 패턴, 캔버스를 뒤덮은 꽃씨 등이 이때부터 나타나게 된다.

57년 그녀는 홀연히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먼저 올라갔다. 넓게 펼쳐진 뉴욕을 보면서 나는 내가 가진 예술에 대한 열정과 그리고 내 안에 산처럼 쌓인 창조에 대한 에너지로 언젠가 뉴욕을 정복하고 내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리라고 다짐했다.”

이후 그녀는 도널드 저드, 에바 헤세, 조셉 코넬 등과 함께 어울리며 아방가르드 작업에 나선다. 뉴욕은 구사마에게 일본에서 억압받던 창조적 에너지를 펼칠수 있는 무대였다. 그는 사회·정치적 이슈 등을 주제로 일련의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거울이나 땡땡이 무늬가 무한 반복 효과를 보이는 설치작품들도 이 시기에 제작하게 된다.

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이탈리아 관 앞을 ‘무단 점거(?)’하고 거울처럼 반사되는 100개의 은색 공을 만들어 하나에 2달러씩 받고 팔았다.

주최 측에 의해 중단됐지만 이 퍼포먼스로 구사마는 주목을 받았다. ‘나르시스 가든(Narcissus Garden)’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번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개인전에 초청돼 갤러리 정원 연못에 전시됐다.

비슷한 시기에 그녀는 하나의 컬러로 이루어진 그물 패턴이 무한 반복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Infinity Nets’ 시리즈다. 세상의 사물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정신적 불안감을 작품 속에 묻어버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이를 ‘말살(Obliteration)’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뉴욕 시기에 대해 구사마는 말한다. “뉴욕에서 나는 작품에 내 자신을 쏟아부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해질녘에야 그만두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리는 패턴들이 내가 있는 방의 벽과 천장 바닥으로 확장됐다. 나는 내가 그것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듯한 환각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이런 패턴들을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까지 확장되는 작품으로 만들게 됐다.” 이번 테이트 모던에 전시된 ‘I’m Here but, Nothing’(2000)은 구사마의 이러한 작품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두운 응접실의 사물과 공간에 색색의 형광색 땡땡이 무늬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확장되는 느낌을 준다.

뉴욕 미술계에서 인지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작품을 팔아 먹고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 제품들을 파는 부티크를 뉴욕에 열었다. 폴카 도트 구멍이 여기저기 나서 신체의 여러 부분과 성기까지 드러내는 옷을 팔았다.

당시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의 물결 속에서 때로 누드와 섹스 등 고정관념을 깨는 주제들로 이루어진 행위예술도 계속했다.하지만 과도한 창작 활동과 셀프 프로모션으로 그녀는 평단의 혹평을 받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소진된 채 73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터프랜시스 모리스는 “그녀가 처음 뉴욕에 온 시기의 미술계는 남자 작가들이 지배하던 세계였다. 어떤 여자 작가에게든 작가로서 인정받기에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말했다.

98년부터 구사마의 대외 업무를 담당한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의 디렉터 글랜스콧 라이트는 그의 뉴욕 시기를 가장 위대한 시기로 꼽는다. “젊은 여자 혼자서,그것도 동양인으로서 뉴욕 미술계에 뛰어들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창조해 냈다.

상업적인 성공도 뒤따르지 않았고 어떤 갤러리도 그녀를 보살피지 않았으며 작품을 사준 컬렉터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 하나만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Brilliance of Life?(2011)/‥Standing on the Riverbank of My Hometown I Shed Tears(2009)/‥Self-Obliteration (Net Obsession Series)(1966)/‥Yayoi Kusama…(1965) Courtesy of Victoria Miro Gallery, London and Ota Fine Arts, Tokyo

35년째 도쿄 정신병원에서 작품 활동

구사마는 일본에 돌아와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환각 증세와 편집증이 심해지면서 77년 결국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정신병원을 아예 집으로 선택한 그녀에게 병원의 조용한 분위기와 규칙적인 생활은 이전의 소용돌이 같았던 삶을 보다 안정된 작업으로 끌어낼 수 있게 했음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소설이나 시 집필 등에 전념하기도 하고, 이전 모티브들을 발전시키는 드로잉과 회화, 조각, 설치 작품들을 계속 제작했다. 그리하여 일본 내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에서 나르시스 가든 해프닝을 벌인 지 27년 후인 93년 공식적으로 일본을 대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이는 그간 구사마 작품의 미술사적 업적을 국제적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됐고 세계적인 미술관들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최근 구사마의 작품들은 화려한 색깔의 회화 작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이번 테이트 모던 전시에는 2009년에서 2011년까지 그녀가 그려온 회화 시리즈 여러 점이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전시됐다.

이 시리즈는 환각이나 강박증 등 정신질환의 불안정함 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밝고 환희로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늘 함께 안고 살아왔던 불안이나 두려움 역시 그림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최근 그림을 제작하면서 마음 상태는 이전의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와 많이 틀려졌을까. 또 작가를 늘 가깝게 쫓아다녔던 죽음에 대한 생각 역시 작품 속에 녹아 있을까. 나의 질문에 구사마는 대답했다.

“그렇다. 최근작들은 초기 작품에 비해 훨씬 행복한 느낌을 많이 주고, 밝은 요소가 많다. 물론 내 나이에 이르면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특별한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나는 그다지 이에 큰 비중을 두는 작품을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저 내가 바라보는 물의 파란색에 매료돼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전 생애에 걸쳐 많은 것에서 영감을 받아 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은 매우 진지한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따라서 최근 작업들에 이 요소가 조금 더 강하게 들어가기도 한다.”

젊어서 행위예술 등으로 표명했던 사회·정치적 비판 의식은 어떻게 드러내는지 묻자 “주로 글쓰기를 통해 입장을 표명해 왔고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통해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14년간 구사마를 지켜본 글랜 스콧 라이트는 작가를 이렇게 평했다.

“첫째로 그녀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둘째로 매우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늘 다음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묻는다. ‘자, 그럼 다음 전시는 언제인가?’라고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무한대의 창작 에너지로 치환해 온 그녀에 대한 프랜시스 모리스의 말은 이번 회고전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녀의 정신적 압박감 등은 창작활동을 지속하는 데 장애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이것들을 다스릴 줄 알았다. 현재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일 매일 길 건너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다. 잘 정돈된 스튜디오에는 스튜디오 스태프들과 그림을 보관하는 수장고와 출판물을 관리하는 도서실 등이 있다. 그녀의 규칙적인 일과를 보면 그녀가 누구보다 건강하게 이 모든 것을 관리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다. 그녀는 그녀의 트라우마와 어두운 과거를 이용하고 다스려 왔다. 보통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을 모든 조건들을 그녀는 거대한 창작 에너지로 돌려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위대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런던 글 최선희 중앙SUNDAY 매거진 유럽통신원·아트 컨설턴트
런던 사진 테이트 모던 뮤지엄·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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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