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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구타 합법 시절 생긴 법이 몽둥이가…

여성주의의 어머니’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성이 남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배하기를 바란다.”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아프가니스탄의 극단적 보수세력인 탈레반은 2011년 여성 교육에 대한 반대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반대 논리에는 이런 게 있었다. 여성을 교육하면 직업을 갖게 되고, 직업상 집 밖으로 나돌면 외간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게 되면 가정이 붕괴하고 가정이 붕괴하면 사회도 붕괴한다. 이런 인식은 탈레반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사회에서는 여자가 열등하다는 편견에서 남녀차별이 당연시됐다. 여자는 부모·남편·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표현이 양반’이다. 여자와 북어를 동급으로 놓고 구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돌던 때가 그리 옛날은 아니다.남녀평등운동의 원천을 살피면 ‘페니미즘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가 나온다. 그는 ‘근대 여성을 발명했다’고 평가 받는다. 그의 『여성권리옹호론(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에는 페미니즘의 ‘설립 문헌(founding document)’ ‘페미니즘 선언(feminist manifesto)’이라는 찬사가 따른다.

어머니 때리던 아버지 보며 성장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시대를 한참 앞선 주장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것은 각기 1920년, 1928년이다. 그는 교육과 고용상의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여성이 결코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열등해 보이는 것은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100여 년이 걸려 실현된 남녀공학을 주장했다. 부자와 빈자의 평등, 능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평등도 주장했다. 노예제도 반대했다. 노예제 폐지 운동이 본격화되기 50여 년 전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선두에 섰던 영국에서도 여성의 현실은 비참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었고 자식에 대한 친권도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됐다. 1782년 영국에서는 아내를 때릴 때 몽둥이가 엄지손가락 굵기보다 가늘어야 한다는 법이 생겨났다. 그나마 사람들의 마음이 트이기 시작한 시대였다. 여성에게 결혼은 직업이었다. 결혼 외에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학교 선생님, 가정교사, 바느질, 매매춘밖에 없었다. 이혼은 불가능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였다. 험악한 남편을 만나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됐다.

미국 국회도서관이 소장한 39여성권리옹호론39(1792)
울스턴크래프트의 활동기는 계몽주의(18세기)와 낭만주의(18세기 말~19세기 초)가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쟁쟁한 당대 사상가들도 상당수는 똑똑한 여자들을 싫어했다. 작가 호러스 월폴(1717~1797)은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치마 두른 하이에나(hyena in petticoats)’라는 별명을 붙였다. 지성들은 남녀평등 문제에 대해선 철저하지 않았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권리옹호론』의 상당 부분을 『에밀』(1762)에 나타난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여성 교육관을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혁명성 때문에 금서가 된 『에밀』에서도 여성 교육은 남성의 훌륭한 내조자가 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역사의 신(神)이 어떤 시대를 개막할 인물을 선정하는 기준은 미스터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할아버지는 우두머리 직조공이었다.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아버지는 술과 도박으로 그 많던 재산을 탕진했다. 농사를 지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가세가 기울어 식구들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주기적으로 구타했다. 한편 어머니는 장남을 편애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장녀 울스턴크래프트가 못마땅했다. 벌로 서너 시간 침묵하게 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독학으로 철학자가 됐다. 정규 교육은 초등 교육을 몇 년 받은 것밖에 없다. 1774년 인근에 사는 성공회 신부 클레어(Clare)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클레어 신부는 『성경』과 조너선 스위프트, 셰익스피어, 존 밀턴의 작품을 읽게 했다.

첫사랑의 부인에게 '셋이 같이 살자' 제의
학교 선생님, 가정교사 생활을 거친 울스턴크래프트는 글을 써서 먹고살기로 결심했다. 마침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출판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다만 여성 작가의 영역은 동화나 소설이었다. 정치·철학 문제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글 솜씨는 주머니에 넣으면 튀어나오기 마련인 송곳과 같았다. 조셉 존슨이라는 출판업자가 그를 알아봤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88년부터 존슨을 위해 잡지 기사, 소설, 동화책을 쓰고 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원전을 번역했다. 또한 토머스 페인,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워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과 같이 존슨 주변에 모이는 쟁쟁한 명사들과 교류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권리옹호론(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Men』(1790)으로 에드먼드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론』(1790)을 반박했다. 『여성권리옹호론』은 단 6주 만에 써냈다. 영국·유럽 대륙·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돼 유명해졌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1735~1826)는 영부인 애비게일을 ‘울스턴크래프트의 추종자’라고 놀려대고 울스턴크래프트를 “미친 여자”라고 부르면서도 울스턴크래프트의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역사적·도덕적 관점(An Historical and Moral View of the Origin and Progress of the French Revolution)』(1794)을 두 번이나 읽었다.

15세에 울스턴크래프트는 독신을 선언했다. 1787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신속(新屬)의 첫 번째(the first of a new genus)”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남녀의 사랑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첫 번째 사랑이 찾아왔다. 1792년 스위스 태생의 화가인 헨리 푸젤리(1741~1825)에게 반했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푸젤리의 아내에게 “셋이서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무리한 생각이었다. 상심한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1792년 파리로 떠났다. 영국을 비운 사이에 성난 군중은 토머스 페인과 그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가 파리에서 본 것은 혁명의 광기와 무질서였다. 공포시대(1793~94)에 3만5000명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신변도 위험했다.

두 번째 사랑이 찾아왔다. 1793년 길버트 임레이라는 미국인 모험가를 만난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남녀 성관계를 경험했다. 임레이는 울스턴크래프트를 미국 대사관에 아내로 등록했다. 결혼한 게 아니라 울스턴크래프트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였다. 1794년 첫째 딸 패니가 태어났다. 임레이는 ‘나쁜 남자’였다. 바람둥이인 임레이는 울스턴크래프트와 딸을 버렸다. 울며불며 애원했지만 딴 여자까지 생겼다. 여자 배우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95년 5월과 10월 자살을 시도했다. 아편제(劑) 과다 복용도 해보고 템스 강에도 뛰어들었지만 살아났다. 마지막 사랑이 찾아왔다. ‘무정부주의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1756~1836)과 연인 사이가 됐다. 둘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서로 싫어했다. 고드윈은 대화를 독점하며 잘난 척하는 울스턴크래프트가 싫었다.

버지니아 울프 '그의 사상과 삶은 불멸'
사랑하게 됐지만 둘 다 결혼을 불신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남녀의 동등한 만남이 아닌 생계를 위한 결혼은 ‘법적인 매매춘’과 같다고 주장했다. 고드윈에게 결혼은 ‘최악의 사유재산 제도’였다. 결혼하지 않으려면 임신을 막아야 했다. 당시의 피임법을 총동원했다. 생리 후 3일간 절제했다. 관계를 자주하면 애가 안 생긴다는 속설대로 하다 보니 오히려 덜컥 애가 들어섰다. 둘은 1797년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집필을 위해 따로 살았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8시간의 난산 끝에 둘째 딸 메리를 낳았다. 출산 후 10일 만에 38세 나이로 사망했다. 산욕열(産褥熱) 때문이었다. 허망한 일이었다. 그는 청결 관념이 투철하기로 유명했다. 출산을 도운 의사는 손이 불결했던 것이다. 상당수 오해와 달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무신론자가 아니어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급진적 개신교 계몽주의(radical Protestant Enlightenment) 운동에 속한다. 그의 사상은 ‘프리섹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설가 조지 엘리엇(1819~1880)은 『여성권리옹호론』을 읽고 책에 나타난 종교적 경건성과 성적 금욕주의에 놀랐다.

18세기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운동가들에게까지 기피 인물이었다. 『여성권리옹호론』을 읽은 순박한 여성들이 인생을 망친다는 내용의 소설도 여럿 나왔다. 남편이 출간한 그의 전기는 프랑스 혁명이 영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보수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생활에 대해 잘 몰랐다. 전기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혼외정사, 자살 시도, 사생아 출산에 대해 상세히 나와 있었다. 남편이 그의 사후에 발간한 소설에는 남편의 음모로 옥에 갇힌 유부녀가 남자 죄수와 간통해 재판정에 선다는 내용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울스턴크래프트는 복권되기 시작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1929년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사상은 불멸이라고 선언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강한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1782년 사망한 후 같은 해 재혼한 아버지를 비롯,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첫째 딸 패니는 22세 때 자살했다. 둘째 딸은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다. 그래서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켄슈타인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둘째 딸은 16세 때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1792~1822)와 1814년 야반도주해 1816년 결혼했다. 유부남이었던 셸리의 첫 번째 부인이 물속으로 투신해 자살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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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