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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잔혹 만행에 두 아들 죽자 부친, 무덤 파고…

청산리 전투 당시 일본군이 부상병들을 후송하며 이동하고 있다. 독립군은 전열 재정비를 위해 러시아로 갔다가 자유시 사변을 겪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망국 10년 만에 일본군 정규 부대를 맞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전 연승한 독립군들은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치러 일본을 쫓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로 이주해 전열을 재정비하려던 독립군은 뜻밖에도 러시아에서 큰 수난을 당했다.

봉오동·청산리 대첩에서 연전 연승한 독립군들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 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독립군들이 북상한 뒤 생긴 공백을 만주의 한인 교포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메웠다.

독립군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패전의 분풀이를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것이다. 일제는 청산리 패전 직후인 1920년 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중점적으로 한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일본군이 퇴각하는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조선군 19사단의 기무라(木村)지대(支隊)는 1920년 10월 22일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와 십리평(十里坪) 일대로 난입해 대한군정서 병영과 사관연성소 건물을 모두 소각하고 백초구(百草溝), 의란구(依蘭溝), 팔도구(八道溝) 등지의 양민 150여 명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학살했다.

10월 30일에는 일본군 제14사단 15연대 소속의 오오카(大岡)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있던 기독교도 마을의 장암동(獐巖洞)을 포위했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은 학살 소식을 듣고 피신했는데 일본군은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3·1 운동 당시의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장암동 학살사건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교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Martin S.H: 중국명 閔山海)과 캐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Foote D.D.: 富斗一) 등인데 마틴의 보고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사(燒死)의 악취가 나고 지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부인 네 명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각자 새로 만든 무덤 옆에 앉아서 우는 소리가 참극(慘極)하였다. 잔옥(殘屋: 무너진 집) 10채를 돌아다니며 촬영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며느리가 통곡을 하며 회진(灰塵: 재와 먼지) 속에서 시신의 타다 남은 부분과 부서진 뼈와 아직 타지 않은 물건을 줍고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을 청해 기도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팔과 발을 얻어 언덕에 안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청산리 전투 때 썼던 독립군의 탄약과 무기. 2 봉오동 대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급(急)사격으로 적에게 120명의 사상자를 낳게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본군은 마틴 등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 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간도출병사')

이때 이를 취재하던 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특파원도 실종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2일자는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는데 생시에도 볼 수 없고 꿈에서도 만나지 못하는가?’라는 내용의 추모사를 싣고 있다. 1925년 8월 30일자에서는 ‘일본인과 함께 나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후속 보도가 있다.

독립신문 93호(1921년 2월 5일자)에 따르면 1920년 12월 6일 일본군은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에게는 얼굴 가죽을 칼로 벗기고 두 눈을 도려내는 만행을 저질렀고 연길현 소영자에서는 부녀자 25명을 강간했으며, 연길현 팔도구에서는 유아 4명을 칼로 베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경신참변인데 장덕준 기자 행방 불명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가 철저하게 은폐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 상황을 알기 어렵다.

독립신문의 '서북간도(西北間島) 동포(同胞)의 참상혈보(慘狀血報: 1920년 12월 28일자)' 등은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의 한인만 피살 3693명, 체포 171명, 부녀 강간 71명에 가옥 손실 3288채, 학교 소실 41개교, 교회 소실 16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산은 '아리랑'에서 삼원포에서 만났던 교사 조운산(趙雲山)을 다시 북경에서 만나 들었다면서 자신이 만났던 안동희 목사 일가가 당한 참변에 대해 전하고 있다.

“안동희와 그의 부인과 딸은 두 아들이 산 채로 세 동강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노목사는 억지로 맨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 그러자 왜놈 병사들이 산 채로 그를 매장하였다. 세 명의 죽음을 억지로 지켜본 후에 부인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 학생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열네 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김산, '아리랑')

이때 북만주 밀산(密山)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전체 병력은 3500여 명에 달했는데, 봉오동·청산리의 잇따른 승전으로 사기는 드높았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徐一)이 맡았고 부총재는 김좌진·홍범도·조성환(曺成煥) 같은 장군들이 맡았다. 총사령은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은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이 무렵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 등은 하바롭스크에 있던 적군(赤軍) 제2군단과 협의해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 독립군 주둔지를 마련했다. 문창범이 대한독립군단에 사람을 보내 자유시로 가도록 권유하자 일단 러시아로 퇴각해 전열을 재정비해 만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자유시 사변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레닌이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회 대회의'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위원회 보고'에서 ‘우리 테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피억압 민족과 억압 민족 사이의 구별’이라면서 식민지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약속한 것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가게 된 주요 동기였다.

그런데 자유시에 러시아로 귀화한 한인 부대들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산하 특립부대 400여 명은 러시아로 귀화한 오하묵(吳夏默)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보통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고 불렀다. 1920년 3월 러시아 적군(赤軍)과 함께 일본이 장악한 니콜라예프스키(니항)를 공격했던 380여 명의 니항군(尼港軍)도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 두 개의 세력이 서로 군권을 장악하려고 다투면서 비극의 싹이 튼 것이다. 1921년 초여름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부대는 모두 4000여 명에 달했으므로 서로 군권을 탐냈다. 니항군은 러시아 흑룡주(黑龍州)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해 독립군 부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조하고 대한총군부·대한국민군 등을 형식상 사할린의용대로 편제시켰다.

반면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만들고 사할린의용대의 지도권을 확보했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북경에서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어업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 영내 한인 혁명단체들의 무장 해제를 거듭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7일 고려군정의회는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극동적군 제2군단 12여단 산하 4개 중대를 차출했다. 사할린의용대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자 6월 28일 12시쯤 총격을 가하면서 무장 해제에 나섰다. 목격자였던 김승빈은 “(양측의 사격) 총소리는 해질 무렵에 가서야 그쳤다”고 전한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사상 큰 비극 중 하나인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黑河) 사변이었다.

이 사건은 경위도 복잡하고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도 일치하지 않는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 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서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 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좌진과 이범석 등은 중도에 만주로 되돌아가 화를 면했다. 봉오동·청산리 승전으로 승기를 타던 독립군은 이 사건 때문에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赤軍)의 공격을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면서 다시 만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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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