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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피부의 '바비 인형'…'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을 보내며

2009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무대에 선 휘트니 휴스턴. [로이터]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허우 샤오셴의 자전적 영화 ‘동년왕사’에서는 답답하고 먹먹한 가슴을 가진 20대 청년인 주인공이 비 오는 오후 창가에 앉아 무슨 노래인지 하염없이 불러대는 장면이 있다. 86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도 그랬다. 친구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데 무력한 날라리 학생이 되어 학교만 오가던 그 시절, 나도 방에 앉아 대책 없이 노래만 마구 불러댔다. 그때 어울리지 않게도 제일 많이 불렀던 게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였다. 노래방도, MP3도 없던 때 워크맨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이어폰을 끼면 귀에는 폭포수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 상태로 앨범 첫 곡부터 끝 곡까지 따라서 ‘완창’하고 나면 팍팍했던 가슴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휘트니는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권 친구들에게는 역사의식 없는 무뇌아로, 팝송 매니어들에게도 몰취향으로 오해받기 쉬운 말랑말랑한 주류 팝발라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휘트니 노래 부르기는 온전히 나만의 은밀한 취미가 됐다. ‘You give good Love to me’가 실린 1집과 ‘I wanna Dance with Somebody’가 실린 2집은 적어도 백 번 이상 불렀던 것 같다.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레이머트 공원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LA 신화통신=연합뉴스]

나도 나름 팝송 좀 듣는다고 주류 히트팝들은 은근 무시하고 싶었지만, 팝계에 신데렐라처럼 데뷔했을 때 그녀는 거부하기 힘든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휘트니는 참 특별했다. 나는 세상에 저렇게 노래 잘하고 저렇게 예쁘고 날씬한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큰 입을 활짝 벌리며 눈웃음짓는 그녀는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미국인들에게도 갈색 피부의 ‘바비인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뮤지션이 되고 싶었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싶었던 내게 휘트니는 ‘완전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뭐랄까.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환함이 있으면서도 파도나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그러다가는 여린 피아니시모의 가성으로 청순함과 애잔함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폭발적인 성량이 있지만 풍성한 울림과 다양한 결이 있어 날카롭지 않다. 온몸을 쥐어짜내는 듯 힘을 주며 성대의 위력을 과장하지 않고 이완된 상태에서 믿기 힘든 고음을 쏟아낸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는 가창력의 소유자지만 듣는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편안함과 아련한 연약함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특별한 점은 남들은 따라올 수 없는 우아함과 세련미, 심지어 숭고함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건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저 하늘이 내려준 천상의 기운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특히 마지막 이유 때문에 그녀 뒤에 머라이어 캐리와 셀린 디옹 같은 이른바 디바들이 줄을 이었다 하더라도, 휘트니의 팬들은 그들을 절대 같은 선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위)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은 18일 그녀의 고향인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엄수될 예정이다. 한 추모객이 뉴어크의 한 교회 앞에서 그녀를 기리는 글을 쓰고 있다. [LA 로이터=연합뉴스]
(아래) 휘트니 휴스턴의 LP음반들. 최정동 기자
노래방에서 이런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는 게 얼마나 밥맛인지 알면서도 90년대 노래방만 가면 ‘Greatest Love of All’ 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고, 또 내가 그녀의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해 주었다. 또 나는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녀가 무너지기 시작한 90년대 말부터 정신적 방황도 겪었다. 나는 그와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봐야 팬 수천만 명 중의 한 사람이었겠지만.

그래서 그녀가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장 낭비해버린’ 자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한심한 인간이었을지라도 어쩐지 그를 감싸주고 싶어진다. 알 것 같다고. 참된 가치를 알기도 전에 마구 닥쳐온 성공, 그 뒤로 버려야 했던 20대 초반의 발랄함과 자유. 대신 치렁치렁 가운을 걸치고 ‘공주’처럼 산 통제된 삶. 벗어나고 싶어 택했던 재기발랄하고 열정적인 남편. 그러나 엄청난 상처와 함께 무너져버린 자존감. 깨진 행복한 가정의 꿈. 헤어나올 수 없는 자기 파괴의 늪. 2009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어두운 날들을 고백한 뒤 ‘나는 내가 가진 힘을 몰랐었다(I didn’t Know my own Strength)’를 부르며 신에게 기도하며 새로운 삶을 꿈꿨지만 끝내 그는 진심으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20여 년이 지나 지난해 내한 소식으로 등장한 40대의 휘트니 사진은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렇듯 특별하게 빛나던 사람이 평범하고 찌든 얼굴로 변할 수 있다니. 그건 그냥 중년이 되어 세월의 흔적이 앉은 탓만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말하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버렸어요. 오랫동안 나는 인생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는, 내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내겐 완벽한 여자였던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기 싫어 콘서트를 가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했다.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휘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아무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단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빛날 수 있고, 또 한순간에 깨어지기 쉬운 허망한 것이라는 건지 느끼게 해줄 뿐. 하지만 분명 휘트니가 남긴 것은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이 먼 곳에서 생각지도 못할 당신의 팬은 그 노래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얼마나 훌륭한 것들을 남겼는지 영원히 되새길 것이다. 고맙다. 당신의 노래 덕에 힘든 시절을 버텼다. 앞으로도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Learning to Love yourself Is the Greatest Love of All)”이라는 당신의 노랫말을 가슴에 담고 살 것이다. 잘 가요, 휘트니.

사진 외신종합, 최정동 기자, 앨범 제공 음악감상실 트래픽 오영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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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