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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백범영-청산리전투, 59×40㎝,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만주의 삼부(三府)
③ 봉오동과 청산리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했다. 일제는 즉각 육사 23기 출신의 아라요시 지로(新美二郞)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

함북 종성군 나남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제19사단은 즉각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넜다. 19사단 보병 73연대 등에서 차출한 정예 부대였다.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방면의 적을 추격해 일거에 적 근거지를 소탕하겠다”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최진동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는 주민들을 산중으로 대피시키고 각 중대를 산 위 요지에 매복시켰다. 홍범도도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면 북단에 매복했다. 군무국장 이원(李園)은 물자 보급과 만약에 대비해 퇴로를 확보했다. 홍범도는 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일본군 유인을 맡겼는데 전의가 충천해 계획보다 더 큰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월강추격대대는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유인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봉오동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 장군은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비슷하게 얕보던 일제는 경악했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90CE>)는 봉오동 패전 직후 육군대신에게 “대안(對岸)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독립군)……전적으로 통일된 군대 조직을 이루고 있습니다(조선군사령관 제102호 전보)”라고 보고했다. 또한 계총영사대리(堺總領事代理) 제166호 전보는 “금회의 추격이 도리어 나쁜 결과를 잉태했다”고 말했으며, 조선군사령관 제45호 전보는 “(독립군은) 재전투 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는 것 같고 장정들이 속속 독립군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제는 독립군이 대거 도강해 한반도 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그러나 대병력이 도강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는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쯤 400여 명의 마적 떼가 훈춘을 습격해 4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영사관 분관과 그 소속 관사를 방화하고 일본인 1인과 수십 명의 한인·중국인을 납치해 퇴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대군을 즉각 투입했는데,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浦潮軍) 14사단 4000여 명, 11사단·19사단·20사단, 그리고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000여 명 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었다.

일본군의 대불령선인(對不逞鮮人) 작전에 관한 훈령은 “해외로부터 무력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킬 타격을 가한다”라고 해 도강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심양(瀋陽)의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여러 차례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 장작림은 마지못해 우에다(上田)와 사카모토(坂本)가 주도하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했지만 길림성장 서정림(徐鼎霖)이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는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 봉오동 전투 직후인 1920년 7월 16일 조선군 참모장 오노(大野) 등은 다시 심양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중국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은 독립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했다가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조선 땅에 들어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 달 걸려 9월 20일께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했다. 안무(安武)가 이끄는 군사들도 9월 말께 이도구 방면에 도착했다.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다. 북로군정서도 다른 독립군 부대처럼 중국군과의 약속 때문에 야음을 틈타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께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했다.

일본군과 독립군은 서로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래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여 결전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독립군들이 첫 번째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청산리 백운평이었다. 상대는 도마사히코(東正彦) 소장이 이끄는 동지대(東支隊)였는데 중화기로 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야마다(山田) 대좌의 연대는 야스카와 소좌의 부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들어왔다.

독립군은 10월 21일 아침 8시쯤 200여 명의 전위 중대를 백운평 깊숙이 끌어들여 섬멸했다.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고 전하고 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甲山村) 부근으로 이동해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독립군은 먼저 남완루구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자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는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22일 아침에는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이렇게 또다시 매복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드디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청산리 대첩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 산록에서 벌어진 이 모든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그러자 자칭 ‘무적 황군(皇軍)’이라던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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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