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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랑할 일 남길 거라고 … 내 사진 찍지 마라

베이징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 차오쿤을 총통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도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쑨원(孫文)을 베이징으로 영입했지만 쑨원이 도착한 지 얼마 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명호 제공]
의원들을 매수해 총통에 선출되기 전부터 차오쿤(曹<9315>·조곤) 은 두 가지 일을 서둘렀다. 천연의 요새 바오두구(抱<728A><5D2E>)에 감금된 5개국 인질 구출과 각 분야의 전문가 발굴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의 중국 주재 공사들은 20여 년 전, 외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죽였던 ‘의화단의 난’이 재발했다며 배상금도 요구했다. “3일 안에 인질들을 구출하지 못하면 24시간 단위로 배상금을 두 배로 올리겠다”며 중국 정부를 압박했다.

토비 두목 쑨메이야오(孫美瑤·손미요)는 협상을 제의했다. 정부군의 철수와 산둥(山東) 독군(督軍) 경질 등 기상천외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사방 400㎞를 중립지대로 선포해라. 우리를 정부군에 편입시키고 쑨메이야오를 지휘관으로 임명해라. 무기와 실탄 외에 3000명이 6개월간 먹을 수 있는 군량미와 군복을 제공해라.” 독군은 한 성(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무리한 요구였다.

미국 측이 은밀하게 차오쿤에게 접근했다. 서구 열강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 때였다. 차오쿤은 어릴 때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해본 사람답게 협상에 능했다. 중립지대 선포를 제외한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쑨메이야오(孫美瑤)의 산채가 있던 바오두구(抱犢崮). 천하 절경인 동시에 외부의 접근이 불가능한 천연 요새였다.
산둥 독군은 차오쿤의 측근이었다. 계급을 한 단계 올려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고 독군 자리는 공석으로 내버려뒀다. 인질들은 풀려나고 쑨메이야오는 여단장 제복을 입었다.
1923년 10월 10일, 차오쿤이 총통에 취임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축하 사절을 파견했다. 2개월 후 쑨메이야오는 파티에 초청받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고 부하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쿤은 총통 직을 돈 주고 샀다며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군벌들 사이에서도 사병 출신이라며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장점도 많았다. 경험 많고 부패하지 않을 사람들을 잘도 골라 썼다. 의원들 매수에 동원했던 측근들에게는 제대로 된 자리를 주지 않았다. 속으론 불평이 많았지만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했다. 일가 친척들은 베이징 출입을 금지시켰다. 무슨 일이건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법도 없었다.

총통 차오쿤은 일화를 많이 남겼다. 국제사회에서 “웰링턴 쿠”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중국 근현대 최고의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을 외교 총장에 발탁한 사람도 차오쿤이었다.

구웨이쥔은 부임 첫날부터 국제연맹 중국측 대표 황룽량(黃榮良·황영량)을 영국대사로 내보내려는 차오쿤의 측근들에게 시달렸다. 황은 차오쿤이 총애하던 외교관이었다.
구웨이쥔이 요지부동이자 실권자였던 교통총장이 차오쿤에게 직접 황을 천거했다. 차오쿤은 “네가 언제 외교를 배웠느냐. 나도 깜깜한 분야라 구웨이쥔을 모셔왔다. 구웨이쥔이 결정할 문제”라며 호통을 쳤다. 후일 구웨이쥔은 장편의 회고록에서 차오쿤을 높이 평가했다. “정식 교육은 못 받았지만 도량이 넓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영수의 품격을 갖춘 지도자였다.”

1924년 11월, 차오쿤은 좌파군벌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각했다. 1년간 연금생활을 하다 풀려난 차오쿤은 평민 생활을 즐겼다. 대문 앞에 앉아 온갖 사람들과 얘기하기를 즐겼다. 총통 시절 “후세에 자랑스러운 일을 할 것 같지 않다”며 사진 찍기를 꺼렸기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화가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에게 서화를 배우며 멋진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매화가 일품이었다.

장돌뱅이 시절, 귀인 상을 타고났다는 3류 창기 류펑웨이(劉鳳威·유봉위)를 10만원 들여 부인으로 맞이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화베이(華北)를 점령한 일본군이 차오쿤을 괴뢰정부 수반으로 세우려 하자 “죽만 먹다 굶어 죽어도 좋다. 일본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며 만류한 사람이 류펑웨이였다.

1938년, 차오쿤은 톈진(天津)에서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항일전쟁을 지휘하던 장제스는 “왜구의 위협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군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치고 승리를 확신했다”며 육군 1급 상장을 추서하고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다. 류펑웨이는 돈은 거절했다. 일본인 문상객들은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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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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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