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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을 벗으며

나는 이틀이 지나면 30년6개월간 봉직하였던 법관직을 떠난다. 퇴임일이 가까워지면서 30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지 실감하고 있다. 법복을 처음 입고 법정에 들어서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며칠 전에는 법복을 입고 법정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소매의 올이 풀어진 낡은 법복이지만, 마치 처음 입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 ‘법관이 왜 법복을 입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평소에 잊고 지내다가 죽음의 문턱에 서서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처럼.
어느 나라나 법관은 법복을 입는다. 법모나 가발까지 쓰는 나라도 있다. 직업상 특별한 복장을 입는 사람은 법관과 성직자뿐인데 이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법관 개인에게 주는 내적 의미다. 목사가 목에 두르는 하얀 깃은 칼 또는 가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일상적인 자신의 영역을 ‘자르고 떠나’, 성사를 집행하는 의례적인 자기(liturgical self)로 거듭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복은 법관이 자연적·주관적 자아와 구분하고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을 뜻한다. 법복을 입음으로써 재판에 임할 때 개인적 취향이나 의식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입장에 서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둘째는 재판의 당사자나 관련자에게 주는 외적 의미다. 법대(法臺)가 당사자 자리보다 높게 되어 있는 것은 법관 개인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과 재판에 대한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성숙하려면 건전한 권위가 필요하고 이를 키워 나가야 한다. 법관이 현명해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의 근본 질서로서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관에게 권위가 부여되고 법복이 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재판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투는 당사자 사이에서 진실을 찾고, 가치가 충돌하는 사안에 관하여 정의를 선언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인간이 참으로 약하고, 부족하며, 편향성을 가진 존재며, 인간이 만든 재판제도 역시 불완전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이를 덮어 줄 법복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요즈음 법원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연예인이 사회적 문제에 관하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하듯이, 법관도 같은 방식으로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법관이 있다. 법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 공간에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할 수 있음은 이론상 가능하다. 그러나 운동경기의 심판이 미리 “나는 이 팀을 좋아하고, 저 팀은 싫지만 공정하게 심판을 보겠다”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아무리 공정하게 심판을 해도 그는 신뢰받기 어려울 것이다. 동창회 싸움부터 정치권 문제까지 자체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에 소송이 제기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위험성이 더욱 크다. 분쟁에 최종 결론을 내려야 하는 법관이 일반인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겠다는 것은 법복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판결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법관의 집을 찾아가 데모를 하는 것, 인터넷에서 주심 법관의 신상털기를 하는 것은 법관의 독립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재판의 공정성을 비판한다는 목적을 가졌다지만, 그 작품 자체가 공정성을 완전히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차라리 희극적이다. 어느 진보논객의 지적대로 축구경기의 특정 부분만 떼어내 편집하여 전체 경기 모습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셈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성의 편협함에 절망감까지 든다.

김용담 전 대법관은 ‘어리석은 법관에게도 독립이 지켜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이렇게 말한다. “법관의 독립은 법관이 현명해서 마련된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법률에만 얽매이는 법관의 어리석음이야말로 법관독립의 본질인 것이다. 간섭하려는 사람이나 세력은 결과의 정당성이나 정의로움을 들어 간섭의 빌미로 삼아서는 안 되고. 법관은 법관의 독립을 들어 자기 결정의 현명함이나 정의로움을 강변하여서도 안 된다.”

법복이 안팎에서 마구 찢기고 있는 요즈음이다. 법복을 벗어 접어 넣으면서 우리 사회에서 법복의 참 의미가 잊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윤재윤 법이 치유력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년자원보호자제도, 양형진술서제도 등을 창안하고 시행했다. 철우 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최근엔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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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