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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 못 본 ‘용인전투’ 5만 대군 일패도지

2005년 10월 미국 상원 의원이던 힐러리 클린턴은 한국인에게는 ‘역사 망각증(historical Amnesia)’이 있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내정된 버웰 벨 장군에 대한 인준청문회에서였다. 한국인들은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다는 것이다. 뜨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20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어린아이들까지 요새에 오르게 한 뒤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Forgive but not forget)”를 복창시키고 있다.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동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망각은 망국(亡國)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기병 300기에 조선군 4만 명(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 어이없이 패배한 쌍령전투는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분하다. 현명한 사람은 과거를 망각하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운다. 그런데 당시 인조를 비롯한 지도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쌍령전투 45년 전에 이와 판박이 같은 전투가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의 용인전투다.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면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592년 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한 전투다. 이 전투는 사료들이 서로 달라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기회에 여러 자료를 대조하면서 다시금 정리해 본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일본군의 침략은 물리적 측면보다 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방어 거점들은 힘없이 무너져 갔다. 당시 일본군에 주목할 만한 장수가 있었는데 스모토 성주인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권을 다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임란 당시 39세의 나이로 출전해 처음에는 해상수운과 수군 관련 업무를 맡았지만 원균의 경상해역이 쉽게 평정되자 곧바로 육전에 참가해 북상했다.

이광 거느린 ‘삼도 민병군’은 오합지졸
음력 4월 28일 신립(申砬)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당시 신립과 이일(李鎰)은 ‘장수 중의 장수’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군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신립의 패배는 큰 충격이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닷새 뒤인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으로 침입한 이래 20일도 안 돼 수도가 짓밟힌 것이다. 이때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 방향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한양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은 전라도순찰사 이광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는 급히 4만 명의 민병을 모아 북진계획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순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전라도순찰사와 온양에서 합류해 한양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온양에서 합류한 군세는 전라도군 4만 명, 충청도군 8000명, 경상도군 1000명 등 약 5만 명이었다. 개전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모인 것이다. ‘일컬어 10만(號曰十萬)’이라 하여 얼핏 보기에는 위세가 당당했다. 군기와 무기와 군량미를 실은 수레의 행렬은 40∼50리에 달할 정도였다.

이광을 맹주로 삼은 삼도 민병군은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으로 불렸다. 이때 권율은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의 중위장으로 참전했다. 근왕군은 곧 북상하여 6월 3일에는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을 무혈 점령했다. 엄청난 규모의 조선군을 보고 겁먹은 일본군이 용인으로 도망간 것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 가운데 주력인 1000명은 한양에 주둔하고 있었고, 600명은 용인 부근의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진을 쳤다.

용인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때 권율은 “적진은 험한 곳에 위치하여 공격하기 어렵다. 한양이 멀지 않고 큰 적이 눈앞에 있다.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자중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적들과 칼날을 다툴 것이 아니라 오직 ‘조강’(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큰 그림을 제대로 본 전략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이광은 곽영에게 조방장 백광언(白光彦)과 이시지(李詩之)를 붙여 각각 1000명으로 선봉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가 음력 6월 5일이다. 조선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일본군은 진지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울에서 주력 1000명을 거느리고 용인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운이 풀려 나무그늘과 풀숲에서 쉬고 있는 조선군을 발견하고 동쪽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가했다. 백광언과 이시지가 전사하고 조선군은 놀라서 도망쳤다.

용인전투가 벌어졌던 문수성의 위치는 용인향토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일대 소실봉으로 추정된다. 다음날인 6월 6일에는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선봉부대가 무너지자 이광의 주력군은 수원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이 아침밥을 지어먹기 위해 불을 피워 연기가 올라갈 때 갑자기 일본군의 기병대가 급습했다. 일본군의 장수들은 얼굴에 쇠로 된 탈을 쓴 채 백마를 타고 마구 칼을 휘둘렀는데, 앞에 있던 충청병마사 신익이 너무 놀라서 도망치자 나머지 군사들도 앞다퉈 도망을 했다. 이광과 곽영, 경상도순찰사 김수도 지휘권을 팽개치고 냅다 도망쳤다. 지휘관이 다 도망간 것이다.

몇만 명의 군사들이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참담한 광경을 선조수정실록에선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결국 조선군 5만 명(일본 측 기록은 10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질서를 유지한 권율만이 부대를 보존하여 약 한 달 후 이치(梨峙)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훗날 행주대첩을 일궈냈다. 이광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약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곧잘 “조선의 장수는 어리석고 무능하다”고 멸시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해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치전투에서 권율이 승리한 7월 8일 바로 같은 날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에게 완패를 당하고 만다.

국가 지도층, 전략적 식견 반드시 갖춰야
이 땅에서 용인전투·쌍령전투의 재판(再版)을 막기 위해선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첫째, 국가지도층은 전략적 식견을 가져야 한다. 이광이 군사를 모아 북진계획을 보고했을 때 숫자만 믿고 직접적 방법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지 말고 원정군의 약점인 보급품을 탈취하거나 게릴라전 형태로 적을 괴롭히는 간접적 방식도 고려해야만 했다. 코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술가는 많아도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적은 것이 언제나 문제다. 둘째, 어떤 경우든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조선의 민병들은 숫자만 많았지 호미나 낫을 들었던 농민이나 노비였다. 공자는 논어 자로편에서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곧바로 실전에 투입시키는 것이야말로 백성을 버리는 것(以不敎民戰是謂棄之)”이라고 했다. 셋째, 패전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리더에게 있다. 구차한 변명으로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백성을 훈련시킬 책임도 리더에게 있고, 훌륭한 전략을 세워 전쟁에서 승리할 책임도 리더에게 있다.

손자병법 작전(作戰) 제2편에는 이러한 리더를 두고 ‘백성의 생명을 좌우하는 자요 나라의 안위를 결정짓는 주인공(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이라고 했다. 당시의 군사제도인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는 많은 약점을 가졌다. 지방단위별로 군사를 모아놓은 뒤 중앙에서 내려오는 장수가 지휘하다 보니 지리에도 익숙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부하들과 친밀감이 전혀 없었다. 급한 상황을 만나면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도망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적어도 리더는 그들과 함께 도망가서는 안 된다. 리더가 훈련받지 못한 백성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이미 리더가 아니다. 같은 상황을 맞으면서 용인전투에는 이광·곽영·김수·신익과 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권율 같은 ‘인물’도 있었다.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물’이 있다. 과거나 오늘이나 그리고 미래에서나 인물이 해답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대로 된 리더는 하루아침에 육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 걸렸다.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을 양성하는 데는 18년, 대대 주임상사를 양성하는 데는 22년이 걸렸다. 기갑사단장을 양성하는 데는 28년이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드는 데는 적어도 이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는 각 분야의 바닥부터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낱 시류에 편승해 졸지에 능력에 넘치는 중책에 앉게 된다면? 평시에는 검증될 일이 적어 잘 모른다. 하지만 위기 발생 시엔 한계가 노출된다. 결국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영향력을 미치는 조직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과거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마라. 그리고 ‘인간’과 ‘인물’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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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