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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경멸해,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찰스와 외도한 사실이 들통나자 키티는 오히려 남편 월터를 윽박지른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잖아.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지루하기만 해.” 키티의 모든 말은 비수처럼 월터의 가슴에 꽂혔다. 자신의 사랑이 조롱당하자 배려심이 깊었던 월터는 지금까지 키티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1925년 출간된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이 작품은 ‘페인티드 베일’ 등의 제목으로 세 번 영화화됐다)에서 가장 서글픈 대목을 보았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잔인하게 잘라내는 장면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한때는 사랑했지만 무슨 이유에서 헤어지게 되는 커플들이 서로에게 잔인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헤어지는 모든 커플이 키티나 월터처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헤어지는 경우라면 서로에게 잔인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아직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잔학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에티카(Ethica)』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이 기쁨을 느낀다면 그는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의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잔인함은 기묘하고, 심지어 괴이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쁘게, 심지어는 분노하게 만드는 감정이니까. 결국 잔인한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 쫓아낸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는 사람은 없게 된다. 당연히 우울함과 슬픔이 기쁨 대신 나 자신을 뜯어먹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잔인함으로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러니 잔인함에 ‘사랑의 자살’이라는 별칭을 붙여줘도 되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멸이 잔인함의 최종 목적일 테니까 말이다.

『인생의 베일』에서 세균학자인 월터는 키티를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국으로 데려가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헌신적인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결정이었다. 합법적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고나 할까? 자신이 바라던 대로 월터는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리고 만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던 키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월터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경멸하느냐고 묻는다. 죽어 가면서도 월터는 키티에게 잔인하게 군다. “아니. 나 자신을 경멸해.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마침내 월터는 “죽은 건 개였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월터의 마지막 말은 올리버 골드스미스(18세기 영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개가 사람을 물었는데,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서머싯 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교훈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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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