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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볜 의대 2년 중퇴,김기림 좇아 南으로...70년대 반체제 동참

집 앞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는 김규동 시인. [사진 중앙포토]
1984년 10월 16일 재야인사 96명을 발기인으로 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발족했다.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계훈제,백기완 등 재야인사를 지도부로 출범한 이 단체에 문단에서는 김규동 시인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주목을 끌었다. 그가 70년대 이후 줄곧 반체제 문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서슬이 시퍼렇던 제5공화국에 재야세력이 정면으로 맞서는 정치적 의미가 다분했고, 김규동이 차제에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보는 문인이 적지 않았다. 문단의 그런 시선에 대해 그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동참하는 것일 뿐 현실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못 박았다.

김규동이 처음 ‘참여’한 반체제 재야 단체도 74년 11월 27일 창립된 비슷한 성격의 민주회복국민회의였다. 당시 김정한, 이헌구, 박연희 등 문단의 중진과 고은, 백낙청, 김병걸 등 반체제적 성향이 강했던 문인들 사이에 김규동의 이름이 끼여 있었던 것은 뜻밖이었다. 김규동은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 동안 문학활동을 중단하고 있었으며, 등단 이후 10여 년간의 작품 활동도 현실 참여와는 거리가 먼 ‘모더니즘 시 운동’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김규동은 70년대 이후 자신의 삶과 문학이 방향을 바꾸게 된 데 대해 “문학 활동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사회 현실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김규동은 1925년 함경북도 경성의 의사 집안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고보를 다닐 때 김기림을 스승으로 만난 것이 그를 시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김기림은 일제 치하의 조선 시단에 모더니즘 시의 뿌리를 내린 사람이었다. 고보의 동급생 가운데는 영화감독 신상옥과 혁신 계열 정치인 김철(소설가이며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한길의 부친), 그리고 월남한 시인 이활, 공중인 등이 있다. 고보를 졸업한 김규동은 부모의 뜻에 따라 옌볜의대에 입학하지만 2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의학 공부가 성격에 맞지 않기도 했지만 경성고보 때 스승이던 김기림의 시적 영향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규동이 48년 단신 월남한 것도 그 무렵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기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온 김규동은 고등학교(현 중대부고) 교사로 일하면서 스승 김기림과 재회해 다시 모더니즘 시에 대한 지도를 받는 한편 김광균, 장만영 등과 함께 습작에 몰두한다. 그해 가을 ‘예술조선’에 시 ‘강’ 등이 입선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직업도 없는 사고무친의 피란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한데 피란 시절에 어울리게 된 조향, 박인환, 김경린, 이봉래 등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젊은 시인들과 ‘후반기’ 동인을 만들어 모더니즘 시 운동을 편 것이 시단에 그의 위치를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수복 후 연합신문을 거쳐 새로 창간된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발탁된 김규동은 55년 10월 첫 시집 ‘나비와 광장’을 내놓는다. 시단과 독자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시집의 출판기념회에서 있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김수영, 전봉건, 이봉래 등 많은 시인과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 학생들이 운집한 이날 출판기념회 막바지 연단에 오른 스물두 살의 서울대 국문과 학생인 이어령은 특유의 달변으로 식장을 압도했다. 그는 우선 김규동의 시집을 격찬한 다음 김동리, 서정주, 백철, 조연현 등 당시의 문학과 문단을 좌지우지하던 주요 문인들을 싸잡아 공박했다. 식장에 참석했던 문인들은 잔뜩 긴장했으나 학생 등 젊은층의 청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의 발언 내용은 ‘우상의 파괴’라는 제목의 평론으로 만들어져 56년 5월 한국일보 일요판에 게재됐고, 이어령은 그때부터 ‘스타’로 떠올랐다.

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김규동은 시단의 중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으나 그의 현실적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다소 고집스러운 데도 있어서 그는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연합신문과 한국일보가 그랬고, 뒤를 이은 삼중당의 주간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출판사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그 무렵엔 모더니즘 시 운동도 다소 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므로 시를 쓰는 일도 시들해진 듯싶었다.

72년 무렵부터 활동을 재개한 김규동은 10년 전에 비해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시에서는 모더니즘의 색채가 희미해진 대신 현실 참여의 기미가 농후해졌고, 재야인사나 지식인의 반체제 저항운동에는 빠지는 법이 없었다. 79년 6월에는 카터 방한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돼 구류를 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든 그는 조용히 들어앉아 나무에 시를 새겨 넣는 전각에 취미를 붙였다. 그 솜씨는 몇 년 만에 꽤 높은 경지에 이르러 2001년 초에는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통일 염원 시각전’이라는 전시회를 열 정도였다. 그가 평생 염원했던 것은 통일이었고, 평생 가고 싶어 했던 곳은 고향이었으며, 평생 그리워했던 것은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식구들이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은 채 2011년 9월 28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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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