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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노인의 비극은 늙은 것이 아니라 한때 젊었다는 것”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게 악수를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낯익은 얼굴이 분명한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입에서 뱅뱅 맴돌 뿐이다. 돌아서서 한참 동안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보고 나서야 간신히 이름 석 자를 꿰어 맞췄다.

 어제는 ‘Time to say goodbye’를 이중창으로 부른 영국 팝페라 가수 새러 브라이트먼과 이탈리아 출신 시각장애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다. “처음엔 이름, 다음엔 얼굴을 잊는다. 이어 지퍼 올리는 것을 잊고, 다음엔 지퍼 내리는 것을 잊는다.” 독일의 법학자 레오 로젠베르크가 했다는 말이 소름 돋게 와 닿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 기능뿐만 아니라 정신 기능도 떨어진다. 기억력 감퇴가 가장 일반적인 증세다. 특히 고유명사를 잘 까먹는다. 인간의 기억력은 22세가 됐을 때 최고조에 달한다고 한다. 그 후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해 40세를 전후해 급격히 떨어진다. 나이 쉰이 넘어 아내에게 메모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꼭 해야 할 일을 깜박해 낭패를 보는 일이 반복되면서 생긴 버릇이다. ‘돋보기 안경 찾아 삼만 리’를 하더니 지금은 아예 집 안 곳곳에 여러 개의 안경을 두고 산다.

 친구들과 모처럼 부부동반 저녁 모임을 했다. 한 친구가 건배사를 한다며 “9988234”를 외쳤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앓고 죽자는 것이다. 건강하게 장수하다 품위 있게 가자는 얘기다. 잘 먹고 잘 사는 ‘웰빙(well-being)’, 멋있게 잘 늙는 ‘웰에이징(well-aging)’, 깔끔하게 잘 죽는 ‘웰다잉(well-dying)’까지 좋은 건 다 하자는 얘기니 지나친 욕심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열렸다지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인지 재앙인지 잘 모르겠다. 평균수명까지만이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7788234’가 소망이다.

 런던대 생물학과 명예교수인 루이스 월퍼트는 나이 여든에 『당신 참 좋아 보이네요(You’re looking very well)』란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쌓여가기 때문에 노인은 젊은이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지혜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문제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잘못을 발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모르쇠로 버티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고 초라하게 물러난 박희태 국회의장을 보면서 노인의 지혜도 노인 나름이란 생각이 든다.

 “노인의 비극은 늙은 것이 아니라 한때 젊었다는 것”이라고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젊은 시절을 아쉬워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자칫하면 노추(老醜)가 된다. 욕심을 접고, 마음을 비울 때가 된 것 같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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