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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6) 은행 구조조정 <9> 명동성당 천막 협상

1998년 9월 28일. 이튿날로 예고된 금융노련 총파업을 막기 위해 서울 명동성당 농성장을 찾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오른쪽)이 단식농성 중인 추원서 금융노련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과 류시열 제일은행장. [중앙포토]


1998년 9월 28일. 명동성당 앞 거리는 시위대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성당 마당 곳곳에 농성 천막이 솟아 있었다. 구호 소리가 뒤엉켜 왁자지껄했다.

추원서·이용득 찾아 호랑이굴로 … ‘총파업 막자’ 프로끼리는 통했다



 “위원장님. 왜 이렇게 판을 벌이셨습니까. 우리 경력(경찰 병력)으론 감당이 안 됩니다.”



 성당 어귀에서 만난 경찰 최고위 간부.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짜증이 섞여 있다. ‘왜 40%나 인력을 줄인다고 했느냐. 데모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자 겹겹이 서 있던 이들이 길을 텄다. 빨간 머리띠에 ‘구조조정 분쇄’란 글씨가 선명했다. 이용득 금융노동조합연맹(금융노련) 부위원장이 나를 한 천막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 추원서 금융노련 위원장이 있었다. 그는 일주일째 단식 중이었다. 여의도 한국노총 회관에서 단식을 시작한 그를 이미 한번 찾아갔었다.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의 주선이었다. 추 위원장이 농성 무대를 명동으로 옮긴 것은 이튿날인 29일로 예고된 금융노련 총파업에 힘을 싣기 위해서였다. 부실 딱지가 붙은 9개 은행의 연대 총파업. 6월 경영평가에서 ‘조건부 승인’ 판정을 받은 7개 은행에 해외 매각이 예정된 제일·서울은행이 가세했다.



 파업 목표는 하나였다. “인력 감축 폭을 줄이라”는 것이다. ‘1+1=1.2’ 내가 천명한 구조조정 원칙을 허물라는 것이다. “합병(+)하고 한 곳에서 40%씩 인력을 줄여 경쟁력을 확보하라”는 게 금융감독위원회의 방침이었다. “20%대 이상의 감원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금융노련은 맞서고 있었다.



 천막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한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헌재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몰려왔다. 퇴출 5개 은행의 노조원들이었다. 명동성당 어귀에서 “퇴직자 재고용을 보장하라”며 농성 중이던 이들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우리 직장 살려내라.” 밀고 밀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텐트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시위대와 수십 명의 사진기자, TV 카메라가 엉켜 뒹굴었다. 금융노련 규찰대가 나섰다. 이날 오전 “찾아가겠다”는 내 제안에 추원서는 “우리 규찰대가 신변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들이 시위대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역부족. 치고받는 아수라장이 계속됐다.



 가까스로 들어선 천막 안. 나는 주저앉아 책상다리를 했다. 추원서가 나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정신 없이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대화로 끝냅시다.”



 추원서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 아침 7시부터 파업에 들어갑니다.”



 “파업에 들어가면 끝입니다.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나는 “불법 파업에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해 왔다.



 “요구가 뭡니까.”



 “25%까지만 양보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건 무리입니다. 정부 안은 40%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대화는 중단됐다. 장소를 옮겨야 했다. 지척인 명동 은행회관으로 피신했다. 금융노련 간부들이 나를 감쌌다. 이때 나를 지켜주던 이 중 하나가 지금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현기환이다. 당시 금융노련 조직부장이었나. 몸싸움 끝에 양복이 찢어졌다. 고맙고 미안해서 양복 값을 챙겨주기도 했다.



 은행회관에서의 대화도 팽팽하긴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면 소득 없는 협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천막을 나설 때 나나 추원서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총파업은 없다’.



 프로와의 대화는 그래서 편하다. 겉으로는 험하고 거칠어 보인다. 하지만 괜한 일에 힘을 빼지 않는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서로 안다. 내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 은행 총파업을 주도한 금융노련은 그런 면에서 프로였다. 단식을 감행한 추원서 위원장도, 중재에 애쓴 이용득 부위원장도 프로다웠다.



 추원서에게는 체면이 필요했다. 그는 전남 목포 출신이었다. 노동 운동판을 영남 출신들이 장악하던 때였다. 호남 정권이라 투사 이미지 쌓기도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단식에 들어간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투쟁 의지를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농성장을 찾은 것은 그의 체면을 제대로 살려주겠다는 뜻이었다.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금감위원장이 직접 금융노련 위원장을 찾아와 협상을 시도했다’. 추원서에게 재협상을 위한 더 이상의 명분은 없다.



 인력 감축 폭을 둘러싼 계산도 천막 협상에서 사실상 끝났다. 추원서가 “25%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한 건 ‘20%대 후반으로 결정해 달라’는 메시지다. 내가 40%라고 주장한 건 ‘30%대 초반에서 끊자’는 뜻이다. 결국 각 은행이 협상을 통해 29~31% 언저리에서 인력 감축 폭을 확정할 것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누구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9개 은행 노조는 그날 밤 11시에 재협상에 돌입한다. 29일 총파업은 당연히 무산됐다. 이 사건 이후 금융시장은 비로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장이 안정됐다는 신호가 간 것이다. 꽉 막혀 있던 신용경색도 풀리기 시작한다. 기업들도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명분과 실리는 다르다. 프로들은 그걸 안다. 판을 벌여 명분을 쌓게 해주면 실리는 조금 양보할 수도 있는 게 프로다. 프로 중의 프로 DJ가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DJ는 2년 뒤인 2000년 7월 금융노조 총파업을 앞두고선 안절부절못했다. 한광옥 비서실장을 통해 내게 “장관이 나서서 무조건 막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출정식만 거창하게 해놓고는 끝낼 겁니다. 이용근 금감위원장이 알아서 잘 할 겁니다”라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당시 재정경제부를 맡고 있던 나는 그바람에 중요한 국제협약 하나를 날려버렸다.





등장인물



▶추원서 전 금융노련 위원장




산업은행 노조위원장 출신. 1997년 금융노련위원장에 취임해 98년 구조조정 정국에서 은행 노조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산업은행 일선으로 복귀해 현재 산업은행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산업은행 상하이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2003년, 상하이를 찾은 내게 근사한 저녁을 샀다.



▶이용득 전 금융노련 부위원장



상업은행 노조위원장을 거쳐 금융노련 위원장이던 2000년 7월 구조조정 반대 파업을 주도했다. 2004년부터 5년간 한국노총 위원장을 역임했고, 지난해 다시 당선됐다. 지난해 11월 한나라당과의 정책 합의를 파기하고 민주통합당 창당에 동참했다. 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가끔 그와 술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술을 끊은 뒤론 안부전화만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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