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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05> 소방관 이야기

9만4738건. 지난해 서울시 119구조대가 현장으로 출동한 건 수입니다. 하루 259번 출동한 셈이죠. 이 중 화재사건만 5526건에 달합니다. 출동 건수가 많은만큼 순직하는 소방관들도 늘고 있습니다. 매년 6∼7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 사람도 330명 정도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말에는 경기도 평택 가구공장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 2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소방관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최모란 기자

큰 불 났던 고려 인종때 궁중서 소방훈련하기도

소방관은 항상 바쁩니다. 불이 나면 뜨거운 화마와 싸우며 집압해야 하고 환자가 발생하면 응급처치를 한 뒤 병원까지 이송합니다. 이 밖에도 폭설, 수해 지진에 대한 예방활동도 담당합니다. 사진은 화재 현장에 물대포를 쏘는 소방관들. [소방방제청 제공]

소방의 역사는 불의 역사와 같습니다. 불을 사용하면서 소방 활동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됐지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소방대는 고대 이집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불을 끄는 직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소방관의 일을 하는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기록된 대형 화재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서기 262년) 때 금성 서문에 화재가 발생해 민가 100여 동이 소실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기 596년인 진평왕 18년에도 영흥사에 불이 나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문하고 구제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삼국시대에는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돼 국가적 관심사였다는 방증입니다.

삼국사기 통일신라 헌강왕(서기 880년)의 기록에는 당시 시민들의 방화의식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강왕(서기 880년) 시절에는 사회가 안정되고 도성 경주가 번창하였다. 초가를 기와로 교체하고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사용하여 밥을 지었다.”

학자들은 이 내용을 당시 주민들의 방화의식이 높았기 때문으로 여깁니다. 특히 가옥을 초가에서 기와로 덮은 것은 밀집돼 있는 민가의 대형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방서에 대한 기록도 있을까요? 고려시대에 소방훈련을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1145년 고려 인종 23년 2월에 서경의 대동문에 큰 불이 났고 그해 5월 임금이 동석한 가운데 궁궐 내 수문전에서 소재도장이라고 하는 궁중소방 훈련을 실시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소재도장은 공공 소방기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궁궐 내 화재만을 대상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화군이 완용펌프를 사용하는 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소방기관은 조선시대 세종대왕(1426년) 재위 당시 설치한 금화도감(禁火都監)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한성(서울)에 큰 화재가 두 번이나 발생해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타고 남자 9명과 여자 23명(어린아이와 병자 등을 제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이 내놓은 종합 화재방지 대책이 바로 금화도감입니다. 화재와 같은 재난을 막고 불이 났을 때 빠르게 끄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죠.

금화도감에 소속돼 불을 끄는 일을 하던 이들을 ‘금화군’이라 불렀습니다. 금화군은 군인이나 공노비로 구성됐고 우물에서 물을 긷고 나르던 노비가 이들을 도왔습니다. 금화군은 세조 때 ‘멸화군’(滅火軍)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금화군은 도성 곳곳을 다니며 불이 났는지를 감시합니다. 밤낮으로 화재를 감시하다가 불이 나면 종을 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다른 금화군들에게 불이 났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방화범을 잡을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지요. 그러나 세조 때인 1460년 관원 수를 줄이는 구조조정 바람이 불면서 한성부로 흡수됐습니다.

고려 때 백령서 큰 불 … 백령진장·부장 관직 삭탈

지금도 큰 불이 나면 예방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책임자에게 벌을 줍니다. 소방법에 따른 것이죠.

예전에도 소방법이 있었나 봅니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보면 화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책임자의 벼슬을 빼앗은 사례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1051년 문종 5년 2월에 백령진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백령진의 성곽 28칸과 민가 78호가 소실돼 백령진장 최성도, 부장 최숭음을 관직에서 삭탈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화재와 관련된 처벌입니다. 당시 2월 1일부터 10월 3일 사이에 실화로 전야를 소실한 자는 태(笞·회초리) 50대, 재물을 연소한 경우는 장(杖·곤장) 80대의 형벌을 주었습니다. 관부나 묘사, 사가, 사택, 재물에 방화한 자는 가옥의 칸 수와 재물 피해를 구분하지 않고 도(徒·징역) 3년형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방법은 조선시대로 오면서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그 골격을 갖추었습니다. 1417년 태종 17년에는 명나라의 법률을 사용해 실화자와 방화자에 대한 형벌을 정하고 시행했습니다. 실화로 자기 집을 태운 자는 곤장 50대, 방화로 자기 집을 태운 자는 곤장 100대를 때렸습니다. 또 인명에 해를 입힌 자는 곤장 100대를, 관·민가를 태운 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추방하도록 했습니다.

첫 근대 소방서는 일제 때 세운 남창동 경성소방서

부상자를 헬기로 이송하기 위해 준비하는 소방대원들.
최초의 근대식 소방서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4월 서울 중구 남창동에 들어섰던 경성소방서입니다.

그 전까지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의용소방대를 만들어 불을 껐지만 경성소방서가 들어서면서 ‘관(官) 주도’로 체계화된 것이죠. 조직은 단출합니다. 소방서장 아래 펌프반, 수관반, 파괴반, 사다리반을 뒀습니다. 불이 나면 펌프반은 장정 6~9명이 달라붙어 완용(腕用) 펌프를 앞뒤서 끌고 밀면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펌프 앞머리에는 지금의 사이렌 같은 쇠종이 달려서 불차의 출동을 알렸지요. 파괴반은 잔불을 정리합니다. 갈고리로 재를 긁으며 마지막 불씨까지 정리를 하는 것이죠.

사다리반은 높은 건물에 올라 인명을 구했습니다. 수직으로 세운 사다리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가는 연습도 했지요. 당시도 지금처럼 소방 헬멧을 쓰고 방화복을 입었습니다. 방화복에는 소속을 알리는 ‘경성’이라는 문자도 찍혔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화재 발생 시 언론에 사실을 발표하고 원인은 조사 이후 밝힙니다.

경성소방서는 1937년 태평통으로 이전하고 해방 이후에는 서울소방서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또 49년에는 서울중부소방서로, 83년에는 종로소방서로 개칭했습니다.

“문 열어달라” “애완견 구조” 소방관 출동 안합니다

소방관은 불 끄는 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소방관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키는 모든 일을 합니다.

한파, 폭설, 수해, 지진 등 자연재해 예방과 대책수립은 물론 화재, 재난·구급 등에서의 인명구조, 피해확산 방지를 위한 대응과 재난 현장 복구 업무도 총괄합니다.

문제는 직무의 범위가 넓어 여러 가지 민원이 많다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지난해 서울시 119구조대가 출동한 건수는 9만4738건입니다. 출동 원인으로는 화재가 17.1%로 가장 많지만 실내 갇힘 12.3%, 승강기 사고 4.5%, 교통사고 4.2%, 수난사고 1.5%, 산악사고 1.3% 등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위급한 사안이 아닌데도 소방관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애완견이 구멍에 빠졌으니 구조해달라’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현관문을 열어달라’ 등등.

그래서 정작 소방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는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문제가 계속 생기자 소방방재청은 지난해 9월부터 위급하지 않은 구조·구급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내용의 ‘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119구조대를 부르면 전화를 받았을 때나 현장에 출동, 요청을 거절한 뒤 확인서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취객이 집에 태워다 달라거나 단순히 문을 열어달라는 경우, 타박상이나 열상, 찰과상 환자 중에 응급환자가 아닌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만성질환자가 정기적인 외래 방문을 위해 병원에 가고 싶다거나 치통, 감기 등으로 119를 요청해도 거절할 수 있습니다. 태풍으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간판이 흔들릴 경우는 사람이 다칠 우려가 있으니 제거해 주지만 일반적인 장애물을 치워달라는 요청에는 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화재·구조번호는 119일까

다이얼 쉬운 112 쓰던 일본
혼선 많아 119로 번호 바꿔
우리도 광복 후 일본식 채택


119. 불이 나거나 주변 사람이 다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번호입니다. 그렇다면 왜 119일까요? 이는 일본의 소방역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방제도가 일본의 그것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식 소방제도가 도입되면서 일본에서 사용하던 응급·구조 번호도 그대로 가져온 것이죠.

일본은 벨이 전화를 발명한 다음 해인 1877년에 전화를 수입했습니다. 1879년 도쿄와 온천 지역간에 처음으로 전화를 설치했고 1880년에는 도쿄와 요코하마에 시내전화를 개통했습니다. 전화가 보급되면서 화재 신고도 증가했지요.

그러나 당시의 전화는 호출을 하면 교환수가 하나하나 손으로 연결하는 수동 시스템이었습니다. 화재 신고라고 해도 전화국 교환수가 우선 취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이 뒤늦게 출동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은 1917년 4월 화재탐지 전용전화를 만들어 도쿄와 오사카에서 시행했습니다.

또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은 자동식 교환체제를 추진합니다. 1926년 도쿄, 교토 전화국에서 이를 처음으로 채용하고 화재전용 번호를 112번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비슷한 지역 번호(국번의 제1숫자)와 혼선이 생기면서 접속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1927년부터는 지역번호로 사용하지 않은 9를 채택, 119번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에 이를 받아들여 지금까지 119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 자리 응급 번호일까요? 세 자리 응급 전화가 처음 등장한 곳은 영국입니다. 영국은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화재·응급 구조 번호를 999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영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귀국 후 이 방식을 본떠 미국에 119라는 세 자리 응급번호를 전파시켰다고 합니다. 1957년엔 미국소방안전협회에서 911번을 경찰, 소방 및 응급서비스 호출에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지요. 참고로 홍콩은 영국을 본떠 999번을 응급번호로 사용합니다. 독일은 112번, 프랑스 115번, 스페인 112번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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