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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1) 은행 구조조정 <4> 5개 은행 영업정지

1998년 6월 29일, 서울 적선동 동화은행 본점에서 동화은행 노조원들이 금융감독위원회 직원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날 영업정지 된 다섯 개 퇴출은행에선 노조원들이 전산망을 마비시키는 바람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중앙포토]


1998년 6월 29일 아침 8시.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에선 임시 금감위가 열렸다. 12개 부실 은행의 생사를 최종 의결하는 자리다. 보안 유지를 위해 회의는 전날 부랴부랴 소집됐다. 연원영 부단장이 일어서 은행별 판정 결과를 읽어 내려갔다. “조흥, 조건부 승인. 외환, 조건부 승인. 동화, 불승인….” 대통령에게 보고한 그대로다.

5개 은행 퇴출 작전, 전산키 하나 놓쳐 대혼란



 경기·동화·대동·동남·충청. 다섯 개 퇴출은행장들은 전날 자정 무렵 결과를 통보받았다. 행장들을 금감위로 불러 ‘내용을 통보받았다’는 동의서에 사인하도록 했다. 영업정지를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나는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 연 부단장과 김범석 은행구조조정팀장이 동의서를 내밀었다. 분위기를 전해들으며 기분이 착잡했다. 은행장이 노조에 붙잡혀 부행장이 대신 온 은행도 있었다. “진작 평가 기준을 알려줬으면 1000억원을 더 증자했을 텐데…”라고 울먹이며 사인을 거부한 행장도 있었다. “다 내가 경영을 잘못해서 이렇게 됐다”며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결국 모두의 사인을 받았다.



 연 부단장의 낭독이 끝났다. 한 금감위원이 양승우 평가위원장에게 물었다.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게 평가했습니까.” 양 위원장이 그 위원을 똑바로 보고 답했다. “예. 경평위원들 명예를 걸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평가했습니다.” 또 다른 위원이 물었다. “이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습니까.” 내가 말을 막았다. “결정은 금감위가 하고 책임도 금감위가 집니다.”



 금감위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얘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얘기다.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은행 다섯 개가 한꺼번에 퇴출됐다. 위기 한복판이었던 그때, ‘책임’이란 단어는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다. 엄청난 규모의 결정이 다급하게 내려질 때였다. “어쨌든 이게 최선이다. 안 되면 내가 책임진다.” 이런 각오가 아니고선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버릇같이 “내가 책임진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책임지겠다”는 내 말에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금감위가 끝나자마자 김범석이 달려왔다.



 “큰일났습니다, 위원장님.”



 5개 퇴출 은행의 전산망이 마비됐다는 것이다. 전산요원들이 모두 집단 휴가를 가버린 것이다. 비상 투입된 대체 요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경기은행 전산팀은 전산망 비밀번호를 바꿔놓고 도망갔다. 충청은행은 전산 자료가 몽땅 사라지기도 했다(나중에 이 자료들은 전산실 바닥 밑에서 나온다). 동화은행은 전산팀 직원이 마스터키를 들고 잠적했다. 모두 전산망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스터키라니…’. 머리가 지끈했다. 정부를 떠난 지 20년이 됐다. 직접 은행 거래를 할 일도 거의 없었다. 전산망이 얼마나 복잡하게 돌아가는지 솔직히 몰랐다. 전산팀만 투입하면 전산망을 장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현장의 디테일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인수팀들은 잠적한 전산 요원들을 찾아 뛰어다녔다. 신한은행 인수팀은 동화은행 마스터키를 들고 잠적한 전산 요원을 찾아 집에까지 갔다. 그날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 그때 들은 얘기를 전한다.



 “마스터키를 들고 달아났다는 동화은행 전산팀 대리의 집에 갔더니,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더군요. 그 어머니라고 은행 퇴출 얘기를 안 들었겠습니까. ‘은행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 아들은 어찌 되는 거냐’며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드님이 은행의 중요한 물건을 갖고 계시는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빨리 협조를 안 해주시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협조를 해주신다면 아드님만은 꼭 지키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는데, 마침 그 대리한테서 전화가 온 겁니다. 어머니가 ‘이놈아’ 하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대리를 설득해 비교적 빨리 그 직원을 찾았습니다. 물론 그 대리는 지금도 신한은행을 잘 다니고 있고요.”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동남은행 허한도 행장은 혼란을 줄이는 데 앞장섰다. 한국은행 출신인 그는 이런 혼란을 내다봤다. 퇴출이 임박하자 전산팀 직원들을 경주 보문단지 연수원에 보냈다. 노조의 손길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뒤 인수팀이 본사에 도착하자 전산 직원들을 보내 “인수인계를 해 주라”고 지시했다. 금감위 직원들에게 마지막까지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우리 회사는 괜찮은 회사와 합병시켜 달라. 직원들 일자리를 최대한 보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허 행장에게 그때 “수고했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했다. 그만큼 경황이 없던 때다. 지금껏 아쉽다.



 이런 이야기는 그날 벌어진 아수라장의 한 단면일 뿐이다. 전산망 마비는 7월이 돼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정부에서 나는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등장인물



▶김범석(55)




재무부 공무원 출신으로 98년 금융감독위원회 구조개혁기획단 은행팀장으로 은행 구조조정 실무를 맡았다. 키움닷컴증권 사장, 한국투자신탁운용 부회장을 거쳐 현 더커자산운용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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