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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헤리티지] 수단에 ‘희망의 망고나무’ 심는 디자이너 이광희씨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씨가 서울 이태원동 ‘이광희부띠끄’ 사무실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쳐보고 있다. 위편 책상 위에 세워놓은 책들이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이다. 2000년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한 권씩 쓰셨는데, 남아있는 일기장만 60여 권이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이 뻔한 명제 앞에서 새삼 숙연해졌다.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60·이광희부띠끄 대표)씨를 만나고서다. 이희호·김윤옥 여사 등 대통령 부인을 비롯한 ‘상류층 여성’들의 옷을 만들어 온 그가 2009년부터 아프리카 돕기 운동 ‘희망의 망고나무(희망고)’ 프로젝트에 빠져 산다. 유명인사의 구색 맞추기용 봉사가 아니다. 사단법인까지 만들어 본격적으로 일을 벌였다. 아니 왜…. 그는 “본 대로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평생을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부모님이 있었다. ‘해남의 등대’로 불렸던 고 이준묵(1911~2000) 목사와 고 김수덕(1913~2003) 여사의 2남3녀 중 넷째가 바로 그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2009년 3월 그는 친하게 지내는 탤런트 김혜자씨와 함께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했다. 해외 봉사활동을 ‘구경’할 요량이었다. 마침 건기였다. 땅은 말랐고, 주민들은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망고나무가 들어왔다. 망고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한번 자라면 100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또 시장에서 비싸게 팔렸다. ‘아, 집집마다 망고나무를 심으면 굶어죽진 않겠구나’. 망고나무 한 그루를 심는 데 15달러 정도 들었다. 그는 현장에서 돈을 털어 모두 100가구에 망고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줬다. 그리고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희망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단 남부지역에 총 3만 그루의 망고나무를 심었다.
1 아버지가 평생의 표어로 삼았던 말은 ‘참’이었다. 말과 생각과 행동에 추호의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사진은 아버지가 붓글씨로 쓰신 ‘참’을 새긴 돌. ‘해남등대원’ 대문 위에 붙어있던 돌인데, 이광희 대표는 이를 수단 ‘희망고 빌리지’에 가져가 붙일 계획이라고 했다.
2 아버지 일기장의 한 부분. 하루에 한 쪽씩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다.
3 생전 어머니가 입으셨던 한복이다. 저고리는 이 대표 집에서 사용하다 버린 커텐 천으로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죠. 그때 엄마 생각이 났어요. 엄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절대 그냥 안 넘어가셨겠지….”

 어머니는 늘 “선한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하셨다. 간호사 출신인 그의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구십 평생을 고아와 병자들을 뒷바라지하며 살았다. 1953년 남편 이준묵 목사가 전남 해남에서 전쟁 고아들을 위해 ‘해남등대원’을 설립한 이후 그는 등대원의 어머니가 됐고, 조리사가 됐고, 청소부가 됐다. 한번에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며 보살펴야 할 때도 있었다. 먹을 것도 부족한 시대였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배를 채우려면 어머니의 밥그릇은 늘 가벼웠다. 그래서 어머니의 몸무게는 평생 40㎏을 넘지 못했다.

 다들 기피했던 한센병 환자들도 어머니는 보듬었다. 해남은 소록도와 가까웠다. 소록도에서 외출한 환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기 전에 일단 해남 그의 집을 찾았다고 했다.

 “이 목사 댁에 가면 차비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먹여도 준다고 소문이 났었대요. 한센병 환자들이 집에 오는 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죠.”

 이 대표는 “엄마가 편하게 주무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늘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바람처럼 움직이신 어머니. 정상급 디자이너를 딸로 뒀지만 본인은 평생 손수 지은 무명 한복을 입고 살았을 만큼 청빈한 삶이었다.

 남을 돕기 좋아하는 어머니의 ‘본성’엔 실은 더 깊은 뿌리가 있다. 이 대표는 외할머니 이야기도 들려줬다.

 “외할머니는 집에 품팔이하러 온 일꾼의 애들 식사까지 다 챙기셨을 정도로 베푸는 성품이셨대요. 전남 고흥엔 외할머니 열녀비가 있어요. 외할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넓적다리 살을 베어 끓여드려 살려내셨다고 해요.”

“아버지 일기장에 답이 있다”

‘희망고’ 프로젝트의 꿈은 날로 커지고 있다. 나무 한 그루의 차원을 넘었다. 어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과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 망고 묘목장이 함께 있는 ‘희망고 빌리지’ 건축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수단 남톤즈 카운티로부터 이를 위한 부지 2만2500㎡를 제공받았다.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른 한 명이 자립하면 아이들 열 명이 먹고살 수 있잖아요. 지난해 수단을 방문하면서 옷 100벌을, 완성품이 아닌 재료 상태로 가져갔어요. 그곳 여성들에게 직접 만들게 했는데, 현지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처음엔 ‘희망고 빌리지’에 여성들을 위한 직업센터만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다 생각하니 여성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 기왕이면 남성들에게 농사기술을 가르쳐주는 교육기관도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획은 자꾸자꾸 커졌다.

 “결국 아버지가 평생 하셨던 일을 따라 하고 있는 거였어요. 18살부터 70년 넘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셨던 아버지 일기 속에 ‘희망고 빌리지’의 해답이 들어 있더라고요.”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여사. 1992년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 이준묵 목사도 전방위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해남등대원’뿐 아니라 농민들에게 기술교육을 시키는 ‘삼애학교’와 ‘해남고등공민학교’, 양로원 ‘평화의 집’과 어린이집 ‘천지원’ 등을 만들어 운영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개량된 농사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60년대 초 직접 트랙터를 구입해 농사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또 해남에 YMCA와 라이온스 클럽을 처음 들여와 주민들이 다양한 문화·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줬다.

 이 대표만 부모님의 ‘봉사 DNA’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서울대 사학과를 나온 이 대표의 오빠 이성용(71)씨는 나이 마흔아홉에 서울 직장을 뒤로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해남등대원’을 맡아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음 세대에 그 유산을 전하는 것도 이 대표 세대의 몫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수단 방문 때 스물아홉 살 큰아들을 데리고 갔다.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를 경험에서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젊어서는 막 살고 싶어서 목사 딸이란 걸 되도록 밝히지 않았다”는 이 대표. 이젠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가 삶의 목표가 됐다. 부모와 꼭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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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