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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1) 장제스



▲장제스는 이싱(宜興) 장(蔣)씨였다. 대륙을 떠나기 직전 쑹메이링과 함께 시조(始祖)인 함정후(函亭侯) 장징(蔣澄)의 묘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배하는 장제스의 뒷모습이 처연하다. 1949년 5월 16일 장수(江蘇)성 이싱. [김명호 제공]

장제스, 항일전쟁 승리 기쁨 잠시... ‘5子’ 구렁텅이로



얼마 전 중국의 한 농부가 마을 입구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동상을 나란히 세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눈치 볼 곳이 워낙 많다 보니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보며 “장제스가 없었더라면 마오쩌둥도 있을 수 없었다. 장제스도 같이 걸려야 한다”고 말하는 중국인도 의외로 많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중국전구 최고사령관 장제스의 주권 수호 의지는 단호했다. 참모장 스틸웰의 끈질긴 중국군 작전권 요구에 미국과의 절교, 단독 항전으로 맞섰다. 루스벨트는 동방의 전우를 잃고 싶지 않았던지 “스틸웰이 싫으면 미국 장군 중에서 맘에 드는 사람 3명을 추천하라”며 먼저 꼬리를 내렸다.루스벨트는 장제스가 선정한 3명 중에서 웨드마이어를 중국전구 참모장으로 지명, 사령관 장제스를 보좌하게 했다. 당시 중국전구에는 50만 명에 육박하는 미군 전투병력이 반파시스트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루스벨트와 처칠은 만주에 주둔하는 일본 관동군 섬멸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국제사회에서 공짜는 없었다. 스탈린은 출병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세력 범위였던 곳”이라며 몽고의 독립과 중동철도, 뤼순(旅順)·다렌(大連) 등 두 부동항의 관할권을 요구했다. 주미대사를 통해 루스벨트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안 장제스는 일기에 온갖 욕을 다 퍼부어댔다.



1946년 6월, 국공 내전 초기 국민정부군은 430만 명, 중공의 인민해방군은 120만 명 정도였다. 이듬해 7월에서 12월 사이에 국민정부군 75만 명이 섬멸당하자 장제스는 작전계획을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1948년 1월 7일 일기에 “지도에 표시된 공산비적들의 점거 지역을 보면 당황스럽다. 군의 주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전세를 만회하기 힘들다. 저들은 교활하다. 외곽에서 소란을 일으켜 경제를 교란시키고 물자를 약탈한다. 산악지대에 은거하며 우리 주력 부대와의 전투를 용케도 피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한 달 후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중공의 동북야전군이 전대미문의 대규모 공세를 취하리라고는 예상 못한 듯하다.



1948년 11월 2일, 동북야전군이 국민당군 47만 명을 전멸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피를 토했다. 3일 후 일기에 “군사와 경제의 앞날이 험악하다. 지식인들, 특히 좌파 교수와 언론인들의 정부에 대한 모욕과 무시는 도를 넘어섰다. 민심의 동요가 지금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공산비적들의 일관된 중상모략으로 나 개인의 위신이 추락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적었다.



장제스는 깨끗한 정치가였지만 주변 인물 단속에 실패했다. 중공이론가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장제스,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콩샹시(孔祥熙·공상희),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를 중국의 4대가족(四大家族)이라며 맹공을 퍼부어댔지만 우두머리 격인 장제스는 상하이의 부동산이나 재물을 게걸스럽게 긁어모아 국민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장제스의 처남 쑹즈원과 국민당 최대 파벌을 형성했던 천리푸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장제스의 손위 동서 콩샹시였다.

콩샹시는 고리대금업자 집안의 아들답게 이재에 밝았다. 항일전쟁 시절 미국 정부가 보증을 서서 중국에 지원한 돈으로 장난을 쳤다. 중앙은행의 젊은 직원이 검거되자 장제스가 직접 심문에 나섰다.



장제스에게 호출당한 콩샹시는 죄를 인정하는 듯하더니 금세 태도를 바꾸며 딱 잡아뗐다. 그날 밤 장제스는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 말종”이라는 일기를 남겼지만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직위를 해제하는 선에서 얼렁뚱땅 마무리했다. 공산당에는 좋은 공격거리였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동서 하나 처형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당과 정부의 체면이 손상되고 중·미관계를 우려하다 보니 돈에는 입이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간과한,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항일전쟁에 승리한 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 난징(南京)으로 돌아왔을 때 당과 정부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다. 당원과 공직자들은 집(房子), 자동차(車子), 금괴(條子), 지폐(票子), 여자(女子) 등 5자(五子)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정도로 광분했다. 장제스의 차남 장위궈(蔣緯國·장위국)도 예외가 아니었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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