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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배추 국장의 기쁨이 열무 과장의 아픔 되는 건 결국 ‘폭군의 특권’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프랑스 혁명으로 출범한 제1공화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레고리력(曆)을 새로운 공화력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숭고한 혁명의 뜻을 고루한 삶의 패턴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혁명의 공포와는 달리 공화력은 지극히 낭만적이다. 4월은 ‘플로레알(꽃의 달)’, 7월은 ‘테르미도르(열의 달)’ 이런 식이다.

 이 공화력은 9월에 해당하는 방데미에르(포도의 달)부터 시작한다. 공화정이 수립된 9월을 기념하는 뜻인데 마침 9월 22일이 추분인 게 좋은 구실이 됐다. 공화력 제정위원회를 이끌었던 질베르 롬은 외쳤다. “한 해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순간부터 시작돼야 한다. 프랑스 국민의 대표자들이 시민적·정신적 평등을 선포한 순간 낮과 밤의 평등도 하늘에 새겨졌다.”

 연암 박지원이 동행한 연행사 일행은 북경에 도착한 뒤 청 황제가 여름 휴양지인 열하(熱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감해한다. 급히 열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누구는 북경에서 400리라 하고 누구는 700리라 하며 말이 달랐다. 궁금한 걸 그냥 넘어갈 연암이 아니다. 열하에 도착해서 지인에게 묻는데 그 대답이 걸작이다. “대체로 북경에서 700리인데 황제가 항상 여기 머무르다 보니 신하들이 다들 오기를 꺼려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각 참(站)의 이수(里數)를 줄여 400리로 만들어서 항상 말을 달려 일을 아뢰게 한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시차가 12년에 불과한 동시대의 일이다. 서양과 동양, 시퍼런 공화정과 노회한 제정이라는 간극을 무색하게 하는 교집합이 있다. 우연일 테지만 견줄 만한 우연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인간사회의 속성이 그렇다는 얘기다. 권력의 무소불위 속성 말이다.

 오늘날 우리 땅도 다르지 않다. ‘쇠고기 차관보’ ‘배추 국장’으로 대변되는 물가실명제 해프닝도 다른 게 아니다. 물론 10진법에 맞춰 한 시간도 100분으로 고치려던 자코뱅이나 280㎞ 험한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라던 청 황제와 대통령을 비교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 진정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가엾어 내놓은 궁여지책이란 걸 의심치 않는다. 담당 공무원들이 정신 줄 놓지 말고 책임을 다하라는 채찍이기도 할 터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어디 물가 상승의 원인이 생산과 유통에만 있으랴. 설령 배추국장이 가격을 억눌렀더라도 그 풍선효과로 인한 열무 과장의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지금 프랑스인들은 니보즈(눈의 달) 달력을 넘기고 있지 않다. 청나라도 북경~열하를 왕래하는 대신들의 피로만큼 쇠퇴해 갔다. 필요는 있었지만 방법이 잘못됐던 까닭이다. 방법이 잘못되면 자칫 그 필요는 ‘폭군의 특권’으로 치부되고 만다. 밀턴이 『실낙원(失樂園)』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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