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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장례식 땐 60만 명 동원 추모대회 … 브레즈네프 급서 활용해 중·소 분쟁 해결

국가 최고지도자의 조문 활동은 특수한 상징성을 지닌다.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조문외교는 적대적인 국가 사이에 갈등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은 조문에 관한 한 노회한 지도자였다.

마오쩌둥이 국내외 지도자의 사망 때 조전·조화를 보낸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직접 추모행사에 참석한 경우는 극히 적었다. 1950년 10월 중국공산당 ‘제5대(大) 서기’ 런비스(任弼時)의 영결식은 마오가 신중국 수립 이후 참석한 첫 조문활동이었다.

마오는 소련과 동유럽의 지도자 조문에는 열심이었다. 53년 3월 스탈린의 중병설을 전해들은 마오는 곧바로 주더(朱德)·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주중 소련대사관을 찾았다. 그는 소련대사에게 스탈린의 병세를 위문하고 쾌유를 기원했다. 5일 밤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는 6일 다시 당 지도부를 대동하고 대사관을 직접 찾아 조문했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장례식이 열린 9일에는 베이징 시민 60만 명을 천안문광장 앞에 동원해 추모대회를 열고 스탈린 영정에 헌화했다.

같은 달 15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사망했다. 마오는 주중 체코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56년 3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가 사망하자 밤 11시에 주중 폴란드대사관을 방문해 조문했다. 57년 11월 14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땐 전날 사망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부음을 듣고 모스크바 체코대사관을 찾아가 조문했다. 60년 9월 동독의 초대 대통령 빌헬름 피크가 죽었다. 마오는 주중 동독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마오의 마지막 ‘대사관 조문’이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마오의 추모활동은 급감했다. 10대 개국 원수인 뤄룽환(羅榮桓)·천이(陳毅)의 영결식 참석이 유일했다.

72년 1월 문화혁명으로 박해를 당했던 상하이 해방의 영웅 천이가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고위 관리가 참석하지 않는 2급 장례식으로 공고됐다. 린뱌오(林彪) 사후 파킨슨병에 시달리던 마오는 장례식이 열린 10일 낮 돌연 조문을 나섰다. 그는 잠옷에 양복 상의만 걸친 채 식장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저우언라이는 급전을 돌려 당 지도자들의 참석을 지시했다. 마오는 미망인의 손을 잡고 “그는 좋은 동지이자 훌륭한 사람이었소. 중국 혁명과 세계 혁명에 큰 공을 세웠소. 이것이 그에 대한 최종 평가입니다”라며 천이를 복권시켰다.(아래 사진)

덩샤오핑은 조문외교를 통해 중·소 분쟁을 해결했다. 60년대 이래 양국은 국경에서의 군사적 충돌과 인적 교류 단절 등으로 최악의 관계였다. 82년 3월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 총서기가 먼저 중국과 인접한 타슈켄트에서 ‘두 개의 중국’에 반대한다고 연설했다. 중국에 화해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급사했다. 부음은 11일 새벽 전해졌다. 그날 밤 모스크바 중국대사관은 덩샤오핑의 세 가지 결정을 전달받았다. 전인대(의회 격) 상무위원회 명의로 조전을 보내고, 우란푸(烏蘭夫) 전인대 부위원장을 주중 소련대사관에 보내 조문하고, 황화(黃華)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조문 특사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문을 받은 대사관 직원들은 흥분했다. 조전은 20년 만에 보낸 정부 간 공식 전문이었다.

황화와 조문대표단은 덩샤오핑이 구술하고, 명(名)문장가로 소문난 후차오무(胡喬木)가 작성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안드로포프 총서기와 소련당·정부가 새로운 노력을 펼쳐 중·소관계를 점진적으로 개선시키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총서기’와 ‘당정’을 거듭 표현해 소련공산당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60년대 이래 줄곧 소련공산당을 비난하던 입장을 바꾼 것이다. 브레즈네프 장례식에는 156개 국가 대표단이 참석했다. 안드로포프 신임 총서기는 다른 나라 조문단보다 두 배가량 긴 3~4분간 중국 조문단을 접견하는 배려로 중국을 환대했다. 이어 20년 만에 중·소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열었다.

덩샤오핑의 대소련 조문외교는 계속됐다. 안드로포프 총서기가 집권 1년3개월 만인 84년 2월, 후임인 체르넨코가 집권 1년 만인 85년 3월 사망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각각 완리(萬里) 부총리와 리펑(李鵬) 부총리를 모스크바로 보내 조문했다. 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방중해 덩샤오핑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중·소 관계는 완전히 정상화됐다.(위 사진) 20여 년간의 중·소 대결이 풀리는 데 7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 시작은 덩샤오핑의 조문외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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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