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대동단 출범 계기로 황족·귀족도 독립운동 가세

김가진 장례식. 남작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한 후 1922년 사망하자 임시정부장으로 치렀다. 김가진은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③ 대동단


일제 강점 후 매국적(賣國賊) 중에서도 후회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일본이 신정(新政)은커녕 식민지로 통치하자 속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진회 출신 전협(全協)이었다. 전협은 일진회 이용구·송병준 등의 총애를 받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고종 42년(1905) 부평군수로 나가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도 세 번째로 서명했던 매국적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삼킨 후 일진회까지도 해산시켰고,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전협은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이주했다. 전협은 ‘경찰 신문 조서(1919년 11월)’에서 “당시 그 지방(유하현)에는 배일(排日) 조선인 두목 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윤일(李允一) 등의 일파가 극히 왕성했는데, 나는 일진회원이었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아 견딜 수가 없어 명치(明治) 46년(1913) 여름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일진회 출신이 만주에서 목숨을 건사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전협은 또 부평군수 시절 관내에 있던 윤치호의 토지를 전국환(全國煥)이란 가명으로 사취한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이 드러나 2년4개월을 복역하기도 했다. 석방 후 만주·상해·국내를 오가며 할 일을 모색하다가 3·1운동이 발생하자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조직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919년 4월께 최익환(崔益煥), 승려 정남용(鄭南用), 보부상 우두머리 양정(楊楨) 등과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약칭 대동단)을 결성했다. 3·1 운동으로 일경(日警)의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 대동단은 뱃놀이를 가장해 한강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일제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 있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과 구분되는 특징은 황족·귀족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전협이 대동단의 활동자금을 확보한 것도 남작 정주영(鄭周永)의 장남 정두화(鄭斗和)를 통해서였다. 정주영은 충청도·경기도 관찰사와 귀족원경(貴族院卿)을 역임한 귀족이고 그 아들 정두화도 충청도 호서은행(湖西銀行) 취체역에 종오위(從五位)의 위기(位記)를 가진 상류층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두화에 대해 “성질이 완고하여 시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권 회복을 꿈꾸다가 불량배의 꾐에 빠져 독립자금을 공급했다는 의문이 수차 일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항일 의지가 있었다.
‘신문조서’에는 정두화가 처음에는 ‘아직 부친의 감독 밑에 있기 때문에 출자는 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1만100여원의 거금을 전협 등에게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대동(大同)은 원래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나오는 공자가 말한 이상사회를 뜻하지만 전협은 온 민족의 대동단결이란 뜻으로도 사용했다.
일제 당국의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대동단의 3대 강령은 “①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 ②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③사회주의를 철저하게 실행할 것”이었다. 대동단은 총독정치 철폐, 일본 군대 철거 등을 결의하면서 “완전한 독립정부를 성립시킬 때까지 가정부(假政府·임정)를 원조할 것”도 규정했다. ‘신문조서’는 전협이 ‘상공단(商工團), 청년단(靑年團), 유림단(儒林團), 진신단(縉紳團)을 결속해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 운동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공단은 전 보부상 두목인 피고 양정에게, 청년단은 피고 나창헌(羅昌憲)에게, 유림단은 이래수(李來修)에게, 진신단은 김가진(金嘉鎭) 및 이달하(李達河)에게 서로 연락하면서 일치된 운동을 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동단의 활동은 대담했다. ‘증인 조종윤(趙鍾胤) 신문조서’에 따르면 대동단은 원은동(援恩洞) 159번지 조은성(趙銀成) 소유의 점포를 월세 10원에 빌리고, 황금정 이건호(李建浩)의 집과 주교정(舟橋町) 최익환의 셋집에도 인쇄기와 활자를 비롯한 인쇄시설을 갖춰놓고, 겉으로는 인쇄업자로 가장했다. 그러곤 비밀리에 ‘대동신보(大同新報)’ 1만 매를 인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대동신보’ 외에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내는 ‘진정서’ ‘일본 국민에게 고함’같은 경고문도 작성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되는 최익한은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警告于觀望淸談之諸氏)’이란 경고문도 작성했는데, 그 말미에 “최근 10년간 학정의 자취는 우리 민족을 박멸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차라리 일본의 칼[蠻劒]에 옥쇄(玉碎)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사회주의자가 되는 권태석(權泰錫)은 ‘등교 학생 제군에게’라는 글에서 동맹 휴학을 계속하라고 권고했다. 이 유인물들은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이을규(李乙奎)가 중심이 되어 각지에 배포했다.
이런 활동들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대동단의 총재가 김가진이고, 그가 상해로 망명한다는 사실이었다.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전협은 원래 김가진과 알고 있었는데, “(전협이) 방문해 대동단에서 발행한 문서를 보이자 적극 찬성하면서 참가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김가진은 고종 32년(1895) 농상공부 대신을 역임하고, 고종 37년(1900)에는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 거물이었다. 대동단에는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金毅漢)도 가입했는데, 일제의 ‘공판시말서’는 앞의 ‘등교 학생 제군’ ‘일본 국민에게 고함’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이란 글도 모두 김가진의 동의를 얻은 후 최익환이 인쇄했다고 전한다. ‘대동신보’도 김가진·전협·정남용이 집필했으며, ‘대동단 규칙’도 김가진이 지었고 체부동(體府洞) 김가진의 집에서 인쇄했다고 써서 김가진이 명목상 총재에 머물지 않았음을 적시하고 있다.
1919년 5월 23일 최익환과 권태석이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대동단에 위기가 닥치자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연통제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을 밀파해 저명인사들을 망명시키려 했다. 김가진의 망명은 이런 움직임과 맞아떨어지면서 폭발력을 갖게 되었다.
전협은 ‘신문조서’에서 “상해 가정부(假政府)에서 이종욱이 입경해 나를 양정의 집으로 찾아왔다”고 말해 대동단이 임정과 연락망을 갖고 있음을 시사했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전협은 이종욱이 상해 임정에서 가지고 온 30여 명의 망명 대상 명단을 보았다’면서 “지금 기억나는 인명은 이강 공(李堈 公·의친왕), 박영효(朴泳孝), 김가진, 김윤식(金允植), 이용식(李容植), 이능화(李能和), 이용태(李容泰), 정운복(鄭雲復),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등이었다”고 말했다.
대동단의 정남용은 ‘신문조서’에서 “이종욱이 내게 ‘가정부의 각원(閣員·국무위원)으로부터 왕족·귀족 중 상해로 올 만한 사람이 있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안내해 데리고 오라는 부탁이 있어서 왔다’고 말했다”면서 저명인사 망명계획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 독립을 상하 구별 없이 모두 희망하고 있으나 왕족·귀족 및 유산계급(有産階級) 사람은 운동을 피하며 매우 냉정하게 처신하고 있는데 그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결과가 좋지 않다. 그런 계급의 사람을 상해로 데리고 간다면 조선인은 상하 구별 없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왕족·귀족을 상해로 데려가려는 것이다(‘정남용 신문조서 3회’).”
전협은 ‘신문조서’에서 상해에서 온 이종욱이 자신에게 “김 남작을 동행하기 위해 왔다고 하기에 이종욱에게 체부동 김 남작의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진술해 자신이 임정 특파원 이종욱과 김가진을 연결시켰음을 시인했다.
그런데 정남용은 ‘신문조서’에서 “김가진에게 상해로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발의에 의해 대동단 본부를 상해에 두기 위해 가게 되었다”면서 임정의 권유 이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임정특파원 이종욱이 망명시키려던 주요 인물 중에는 고종의 친아들인 의친왕 이강도 있었다. 그러나 두 거물을 한꺼번에 망명시키기가 쉽지 않자 이종욱이 먼저 김가진을 망명시키고 난 후 전협이 의친왕을 망명시키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전협은 경신학교(儆新學校) 북쪽 모퉁이 이종욱의 기와집 숙소에서 상해로 망명하는 김가진이 아들을 통해 의친왕 이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이강에게 전한 편지는 “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인데 전하께서도 따라서 왕림하시기 바랍니다(‘小人今往上海計殿下從此枉駕’)”라는 내용이었고, 편지 끝에 김가진의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가진은 서울을 떠났다. 그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고 비난받던 황족·귀족들의 망명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을규는 대동단의 각종 유인물 배포를 도맡고, 의친왕 망명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대동단의 주모자 전협은 일진회 간부였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