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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과 남북 과거사 청산론

김정일의 장례식에서 보인 김정은의 모습이 남쪽 일각에 변화의 기대를 심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김정은의 눈물에 끌렸다. ‘계산된 정치적 눈물’이니 ‘앞날이 겁나 그랬다’느니 하는 비아냥과 ‘아버지 생각에 운 것’이란 해석이 엉켰지만 나는 뒤의 해석에 기운다. 개인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연전에 돌아가셨을 때 그랬다. 조문객 없는 새벽 한두 시쯤 영정을 만지면 눈물이 그냥 흘렀다. 더 이상 뵙지 못할 것이란 사무침. 지금도 그 느낌에 사로잡힌다. 김정은도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영결식 날 두터운 옷차림도 아니면서 운구차의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잡고 추운 날씨 속에 오래 아버지 관을 따라 걷는 걸 인상 깊게 봤다. 진짜 효심이었으면…. 그런 생각, 김정은에게도 따뜻한 피가 흐르며 그래서 김정일 시대와는 다르게 지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긴다.

그 밑엔 ‘김정일이 남북 대결과 갈등의 역사를 안고 죽었다’는 생각, 즉 ‘김정일의 과거 청산’이 작용한다. 지독한 독재자가 과거를 안고 죽었으니 그 아들과는 잘 할 수 있겠다는 것. 진보·좌파 진영에서 더 크게 울리는 기대다.

경남대 김근식 교수는 ‘새판 짜기’라는 개념으로 이를 구체화한다. ‘김 위원장은 역사의 부채를 안고 죽었다. 김정은은 그와 관련 없다. 따라서 현재 경색 국면을 돌파하고 변화를 이끌려면 남측이 먼저 새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를 안철수씨에게도 강의했다. ‘미래 권력’일 수도 있는 안씨는 이의제기 없이 들었단다. 김 교수는 “많은 이들이 청산론에 공감한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김정일 사망 직후 “남북관계를 새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이 계기’라는 생각 전체를 동심원으로 보면 청산론은 중심에 있다. 중심에 가까운 논리로 ‘김정은 체제를 인정해 대화·협력하자’ ‘천안함 폭침 이후 대북 교류를 금지한 5·24 조치를 철회하라’ 같은 것이 있다. 국정원이 한때 만지작거렸던 ‘장성택 키우기 프로젝트’를 부활하자는 아이디어도 그렇다. 실세인 그가 책임 맡은 평양의 10만 호 살림집 건설을 지원하고, 인도적 지원도 늘리면 군부도 견제하며 김정은이 남쪽과 협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산론과 그의 활용은 매력적이다. 막힌 남북 관계를 뚫을 것 같은 좋은 논리다.

그런데 ‘죽음’ 하나만으로 김정일이 할퀸 북한 역사, 남북한 역사의 상처를 청산했다고 하는 게 옳고 또 그게 가능한 것일까. 나치 청산까진 아니어도 한국의 과거 청산을 보라. 예를 들어 5·18 광주 민주항쟁의 역사를 올바르게 청산시킨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엔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파인 상처를 재정립하려는 노력들은 길고 치열했다.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박왕자씨 피살, 대남 군사도발, 버마 테러, KAL기 테러처럼 피 묻은 과거는 김정일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실 하나로만 청산되지 않는다. 사건 하나하나 과거에서 불러내 책임자를 피고석에 세우고 응분의 죄를 물은 뒤에야 가능하다.

청산론에 깔린 ‘남이 그러면 북도 호응할 것’이란 희망에도 북은 찬물을 끼얹었다. 김정은이 내세운 ‘유훈통치’는 문제의 김정일 과거도 정통성의 중요한 유산으로 만들 터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연 이틀씩 ‘역적 패당’으로 부르며 “영원히 상종 않겠다”고도 했다.

그러니 김정일의 죽음을 ‘과거 청산’으로 정의하거나 비슷하게 여겨 대북 정책 전환의 논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 민주화 경험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지금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언젠가 북한과 접촉할 때 천안함·연평도 같은 난제를 에둘러 가는 소재로 쓰면 된다.

청산론은 ‘김정일의 사망을 계기로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출발점이다. 좌우 할 것 없다. 청와대도 고위층이 나서 “김정일도 죽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전문가들에게 물은 게 확인됐다. 모두 이리저리 답을 묻는다.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청산론이건 무엇이건 당장은 남북 모두 답을 찾기 쉽지 않다. 북한엔 1월 8일 김정은 생일,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15일 김일성 생일 같은 중요한 정치 일정이 계속된다. 남에도 4월 11일 총선과 12월 19일 대선이 있다. 답답하지만 양쪽 다 뭘 할 수 있는 정치 지형이 아니다. 덩샤오핑은 이런 때에 알맞은 지혜를 어록에 남겼다. ‘냉정하게 관찰하라, 진영을 정비하라, 그리고 침착하게 대응하라(冷靜觀察, 穩住陣脚,
着應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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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