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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햄릿, 아름다운 별이 지다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해 12월 31일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는 늘 조용하고 차분했다.

1980년대 많은 모임에서 그의 자리는 대체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이거나 뒤편이었다. 85년 8월, 내가 그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그랬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감옥으로 감옥으로 두려움 없이 달려가던 ‘젊은 사자들’의 정의감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군사독재정권이 ‘학원안정법’이라는 족쇄를 입법 시도하자 당시 모든 민주화운동단체가 농성과 집회로 맞서던 때였다. 그날, 서울 중구 장충동 분도회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농성장에 그는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맑고 고왔다. 내가 다가가 인사하자 그는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건네는 말이 너무 겸손하고 따뜻했다. 세상에나! 그가 흉악무도한 권력과 맞서고 있는 투사라니! 믿기지 않았다.

한 달여 뒤 그는 악명 높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훗날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바로 그곳에서 그는 차마 필설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죽음의 심연, 그 어둠 속에 홀로 떨어져 더러운 고문자의 손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교도소의 찬 마룻바닥에 내던져진 채 상처 입은 짐승처럼 스스로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인재근에게 그 ‘짐승의 시간’을 낱낱이 전했다. 인재근 등은 즉시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제목을 단 8절지 크기 유인물은 숱한 양심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 격렬하게 꽂혔다. 모두 오열하고 분노하고, 그리고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자식을 감옥에 둔 어머니들이 더 이상 판검사에게 석방을 애원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대신, 김치 담그던 손을 씻고 돌아서서 그 유인물을 뿌렸다. 스티커를 제작해 건물 외벽과 버스 등에 붙이고 다녔다. ‘고문정권 타도하자’며 법정에서, 거리에서, 구치소 안팎에서 소리쳤다.

필자 역시 그렇게 거듭 태어난 ‘호모 폴리티쿠스’ 중의 하나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를 읽던 날의 기억은 아직 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선명하다. 밤이었다. 혼자 통곡하다가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의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버스가 달리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TV가 떠들고, 승강기 안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살인집단이 권좌에 앉아 호령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나락으로 처박혀 죽음에 이르고 있는데 어찌 아파트의 창문마다 불빛은 그다지 영롱할 수 있는지.

나는 그날, 즐겨 보던 소설책과 비디오테이프를 상자 속에 넣어 묶어 버렸다. 김근태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다. 소설 같은 건 잊어버리기로 했다.
김근태는 국회의원, 장관, 정당 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 속에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83년, 민청련은 지하서클이 아니라 공개적 운동단체로 처음 깃발을 올렸다. TV·라디오마다 ‘뚜뚜전’ 뉴스를 하던 시절이었다. ‘광주사태’가 은밀한 암호처럼 골방이나 지하에서 귀엣말로 돌아다니던 동토(凍土)였다. 권력은 포악했고 지식인과 언론은 침묵하거나 굴종했다. 민청련은 곧 진군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창립대회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단다. 의장으로 뽑힌 그는 청년들 속에 섞여 있다가 단상으로 올라서 수줍게 운을 뗐다. “여러분, 저 잘 모르시죠?”라고.

수많은 청년이 일상적으로 잡혀 가고 수배당하고 매 맞으면서 굳세게 버티자 많은 민주화운동단체가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함께 걷는 이가 많아지면서 마침내 87년 6월 민주항쟁을 향해 서서히 대오를 정비했다. 지혜도 쌓여 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함을 깨달았다. 김근태는 감옥 안에서 부단히 희망의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그는 ‘갇힌 자유인’이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밀리언셀러가 되던 즈음에 나는 그 시집을 감옥에 넣어 주었다. 그는 섬세한 독후감을 보내왔다.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는 여리고 고운 남자였다. 아내의 생일에 그는 교도소 창살을 사이하고 인재근에게 ‘사랑으로’ 노래를 바쳤다. 그의 눈물은 고였지만 흐르지 않았다. 그가 딸 병민을 ‘참배공주’라고 부르며 쓴 옥중서신을 읽은 박완서 선생은 “세상에서 저만 딸을 가진 아빠처럼 으스댄다”고 엷게 웃었다. 그는 딸 앞에서 한없이 작은 아빠였다.

어린 딸뿐만 아니라 강아지 ‘또또’에게도 낮고 따스한 주인이었다. 국회의원 시절에 그는 딱 한 번 권력을 행사했다. 출산 후유증으로 위태로워진 ‘또또’를 안고 동물병원 문을 두드렸는데 그날이 마침 휴일이었다. 그는 수의사에게 전화했다. “나 이 지역 국회의원 아무개인데 우리 ‘또또’ 좀 살려 주시오”라고. 수의사는 헐레벌떡 뛰어왔고 ‘또또’는 생명을 건졌다.

난세 아니었다면 빼어난 학자 됐을 것
6월 민주항쟁이 준 선물로 그가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하던 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교도소 정문 밖에서 그를 맞이했다. 잔잔한 걸음걸이, 하얀 얼굴이 조용히 웃었다. 사나운 분노도 복수를 노리는 날카로운 눈매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햄릿’을 보았다.

그는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인텔리겐치아다. 난세가 아니었다면 학자로 빼어났을 사람이다. 가장 온순한 인간을 가장 열렬한 투사로 길러낸 것은 바로 불의한 시대였다. 햄릿 같은 외모와 언행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역사의 고비마다 표적을 향해 적확한 전술을 구사했다. 민청련 창립과 지금까지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 선언이 그렇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분양원가 공개’와 ‘국민연금 지키기’를 두고 벌인 논쟁은 햄릿의 성품과는 사뭇 다르다.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맞서는가 하면 경제부총리의 정책에 ‘하늘이 두 쪽 나도 국민의 땀의 결정체를 지키겠다’고 날을 세웠다. 두 경우 모두 ‘민중’의 이익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이럴 때 그는 단호했다.

김근태는 사실 출옥 이후부터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여러 가지 증세가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병상에 눕는 것이 두려워 병원을 멀리했다. 아마도 고문의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찌는 더위에도 에어컨을 켜지 못했다. 그를 쉬게 하지 못한 것이 지인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 후회스럽다. 어쩌랴. 모든 깨달음은 한 발 늦게 온다. 운명적 시차이다.

그는 초인적 의지로 버티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늘 고민하고 궁구하고 그리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민주주의 제단에 삶을 송두리째 바쳤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에는 그의 피가 묻어 있다. 운명하기 몇 시간 전에 나는 병실로 뚫고 들어가 그를 보았다. 손발은 티 없이 깨끗했고 아직 따스했다. 잦아드는 그의 숨 앞에서 크게 말했다. “훌륭한 삶이었습니다. 오래 잊지 않을게요!”

김근태.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정신이 절멸하지 않는 한 행동하는 햄릿, 그 이름은 살아 있으리라. 오오, 진정 아름다운 별이 지고 말았다.
부디 하늘에서 평안하소서.


유시춘 작가·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소설 『우산 셋이 나란히』(90년·푸른나무), 『안개 너머 청진항』(95년·창비사) 등을 출간했다. 87년 6월 항쟁 지도부인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과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 활약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누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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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