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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뒤축 닳은 낡은 구두에게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해 마지막 날. 구두를 신기 위해 신발장을 연다. 몇 켤레의 구두 중 잠시 머뭇거리다 제일 굽이 많이 닳은 것을 골라 신는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며 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하필 이 구두지?” 구두는 온 몸의 하중을 받는다. 삶의 무게를 그대로 떠안고 지탱하는 것이 구두다. 오죽하면 구두 굽이 닳겠는가. 구두 굽이 닳는 것은 그만큼 삶이 무겁고 고단하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구두 굽이 많이 닳은 낡은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측은함마저 느껴진다. 거기엔 굽이 닳아 없어질 만큼 부지런히 때론 정신없이 뛰어다닌 자기 삶에 대한 남모를 연민과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세밑에 뒤축이 닳아 뭉툭해진 구두 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결코 무심할 수 없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지난 한 해 동안 이 구두는 어떠했나. 유난히 매서웠던 추위 속에서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찬바람 쌩쌩 이는 길을 걷던 구두는 꽁꽁 얼어붙기 일쑤였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구두는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염화칼슘에 범벅된 눈이 진창으로 둔갑해 질척거리면 구두는 진흙뻘 속에 잠긴 꼬막 신세가 되어 버리곤 했다. 그런가 하면 한여름 그 구두는 땀에 절어 고약한 냄새에 질식할 정도였고 폭우라도 쏟아지는 날에는 구두 속까지 흥건하게 물이 스며들어 퉁퉁 붇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구두는 불평하지 않았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못난 주인을 부지런하다 못해 미련할 만큼 이곳저곳으로 실어 날랐다. 때론 들여놓지 말았어야 할 곳에 구둣발을 들여놓기도 했고 또 때론 오래 머물러야 했던 곳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주인의 성마름을 묵묵히 받아주어야 했다. 그 주인이 누구던가. 바로 나 자신 아닌가.



 # 식당을 찾아가면 으레 구두를 벗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적잖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다시 구두를 찾아 신으려고 하면 식당 종업원은 식사를 마친 후 방을 나서는 사람들의 신발을 사진이라도 찍어두었다가 확인한 후 내놓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 사람의 구두를 들이민다.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떻게 그 많은 구두를 다 기억하느냐고 묻자 그 종업원이 말하길, “구두를 보면 그 주인을 금방 알아요. 구두는 주인을 닮거든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구두는 그것을 신은 사람을 닮기 마련이다.



 # 닳고 닳은 구두를 보면 그것을 신은 사람의 자세,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마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구두를 신고 때론 당당할 수 있었고, 때론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으며, 신이 나서 날아갈 것 같기도 했고, 풀이 죽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기도 했었다. 말 그대로 ‘일희일비’했고 이리저리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 모두가 숨길 수 없는 자기 인생이었다. 내 인생의 굵고 큰 행보에서 세세하고 소소한 행로까지 굽 닳은 낡은 구두는 모두 알고 있으리라. 이제 그 구두가 내게 말한다. 새해엔 제발 추운 겨울에 쓸데없이 길거리 헤매며 다니지 말라고. 이 구두는 무슨 고생이냐고. 아무리 화가 나도 길거리의 전신주를 차거나, 길바닥의 보도블록을 내리치진 말라고. 구두는 또 무슨 생고생이냐고. 제발 덜 헤매라고. 제발 덜 발길질하라고.



 # 구두는 진창이든 돌길이든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더러운 것을 밟기도 하고 고통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이 구두의 본분이라 믿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삶에서 가장 아래에, 아니 가장 낮은 곳에 놓인 구두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가장 낮은 것, 가장 낮은 곳에 놓인 것들이 내 삶의 화려함과 우쭐함을 위해 얼마나 소리 없이 희생했던 것인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삶의 무게를 버티며 묵묵히 인생의 길을 함께 해온 구두. 그 뒤축 닳은 구두에게 송구영신의 때 맞춰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고맙다. 구두야!”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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