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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춘향전 이야기가 있고 기러기 솜털이 날리는 듯 … 이것이 길정본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가구. 자개장을 집집마다 들여놓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선 한물간 유행쯤으로 전락해 버린 나전공예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다. 길정본나전공예원 길정본(75) 원장. 대전 장대동 그의 집엔 나전공예에 빠진 일본인 손님들이 숱하게 찾아온다. 나전공예 한류를 퍼뜨리고 있는 그를 f가 찾아갔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길정본 원장에겐 세련된 양장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일본에서 전시할 땐 늘 중요무형문화재 80호 자수장 기능 보유자 한상수의 한복을 갖춰 입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 도쇼쿠(東照宮)의 별장. 조선통신사가 묵어가기도 했던, 지금은 호텔로 쓰이는 그곳 1층 룸에서 13, 14일 이틀간 한국식 파티가 열렸다. 도쇼쿠의 궁사(宮司·신사의 최고 신관) 히사오 이나바(71)를 비롯한 유력 인사 30여 명이 초대됐다. 메뉴는 김치찌개와 갈비. 참석자들은 익숙한 듯 상추쌈을 싸 입에 넣었다.

 파티가 열리기 꼭 한 달 전, 도쇼쿠 영빈관에서 한 달 반 동안 열린 ‘한국나전공예특별전’이 막을 내렸다. ‘한국’이란 이름을 걸었지만 사실상 ‘길정본나전공예원’ 초대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을 모신 도쇼쿠에서 외국인이 전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길정본 원장은 전시를 도와준 일본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이날 한국에서 마련해 온 김치와 갈비로 감사 파티를 연 것이다. 여성들은 가슴에 자개 브로치 하나씩 달고 있었다. 당연히 길정본 작품이다. 이들은 길 원장의 작품에 대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작품을 모아 ‘길정본나전공예박물관’을 차리는 게 꿈이라는 이도 있었다.

나비 브로치. 값은 70만~80만원 정도다.
 전시는 당초 지난 4월 29일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찾아왔다. 도쇼쿠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7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관광객 대신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사태가 언제 수습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했다. 길 원장은 전시를 10월로 미뤘을 뿐, 예정된 규모로 진행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땅을 찾아온 그에게 일본인들은 감복했다. 전시를 여는 동안에도 땅은 수시로 흔들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웃으며 관람했다. 히사오 궁사는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4년 뒤 도쇼쿠 역사 400년이 되는 해에 선생님을 다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무궁화 문양 나전 쟁반. 가운데 정(正)자는 길정본 작품이라는 표시다.
 길정본이란 이름 석자로 일본인에게 신뢰를 얻은 여인. 그는 법관의 아내였다. 충남 금산에서 인삼 농사를 짓는 부잣집 딸로 태어난 그는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가난한 이웃집 오빠와 결혼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남편을 뒷바라지하러 상경한 그는 당장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끼고 있던 반지를 판 돈으로 남대문시장에서 스타킹을 떼어다 인근의 한국은행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곤 인상 좋아 보이는 행원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언니, 스타킹 예쁜 것 많이 있는데….”

 “부모님이 전쟁 통에 돌아가셨나 보네. 쯧쯧…. 이따 점심시간에 2층 휴게실로 와.”

돼지상. 길이가 10㎝도 채 되지 않는 아기 돼지.
 스타킹을 팔아준 여행원들은 레이스 달린 미제 속옷을 떼어 오라고 주문했다. 수예를 잘하던 길 원장은 민자 속옷에 레이스를 손수 달아 마진을 남겼다. 그렇게 뒷바라지한 남편은 4수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가 됐다. 지난해 작고한 박천봉 변호사다.

거북 브로치.
 그러나 판사 부인으로 평탄하게 살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물여덟, 그는 취미로 나전공예를 시작했다. 그의 눈에 드는 디자인이 없었다. 춘향전·흥부놀부전·심청전 등 옛 이야기를 도안으로 그려 넣은 민속장을 직접 디자인해 주문 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마다 탐을 냈다. 아예 공예원을 차렸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지금은 기술자가 20명이 채 안 되지만, 전성기 땐 230여 명을 고용했다. 1984년 와인버거 전 미 국방부 장관이 내한했을 때 그의 집에서 묵었을 정도로 안팎으로 인정을 받았다.

 7남매를 낳았지만 일하느라 바빠 남의 손으로 키우다시피 했다. 아이들은 밥 해주는 아줌마 앞에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엄마 손으로 키워야만 잘 크는 건 아니야. 외국으로 다니느라 돌볼 새도 없었지만 다들 잘 자라줬거든. 사람은 무릇 일을 해야 해.”

 그러나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사기를 당해 부도가 났다. 법관의 아내로서 치명적인 일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87년, 일본 나라시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다. 식민 치하, 할아버지가 공들여 키운 인삼을 마구잡이로 공출해 가던 일본이었다. 그 땅에서 반드시 성공해 수모를 되갚아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예쁘다”를 연발했지만 선뜻 작품을 사지는 않았다. 오니기리(주먹밥)로 끼니를 때우며 각오를 다졌다.

서양식 콘솔에 한국 전통 문양의 자개를 입힌 나전 작품과 쟁반.
 일본인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가구, 혹은 일본식 공예품에 자개를 입혔다.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나전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가구의 전면에만 장식하는 게 아니라 옆면, 심지어 다리에까지 자개를 입혀 화려하다. 호랑이·돼지·거북이·독수리 등 동물 조각에 1㎜ 간격으로 자른 자개를 배치해 마치 짐승의 털이 가닥가닥 빛나는 듯 섬세하게 만든 작품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일이 풀리지 않자 아예 통역도 밀쳐 두고 손짓 발짓 해가며 직접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혼신을 다해 이야기하는 작가의 말에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덩달아 작품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물론 곡절도 있었다.

기러기상. 길정본표 동물상은 1㎜도 채 안 되는 너비로 잘게자른 자개를 입혀 터럭 한올 한올의 느낌까지 살리는 게 특징이다.
 “일본 사람들이 저희끼리 웃고 장난을 치면서 ‘빠가야로’라고 하는 거야. 그게 친근함의 표시인 줄 알고 개막식에 온 시장에게 ‘시장님, 빠가야로!’ 하고는 호호호 웃었지.”

 나중에 통역에게 뜻을 전해 듣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빠가야로’는 바보·멍청이란 뜻이다. 그렇게 익힌 ‘서바이벌 일본어’ 중 몇몇 문장은 이제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일본의 지인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눈물이 나요”를 그녀가 하듯 “눈 안에서 물이 흘러요”라고 하는 식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는데 일본에 대한 분노가 왜 없었겠어. 그런데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들이 정말 많아. 정치인들이 문제였을 뿐, 일본 국민은 정말 훌륭해. 통장에 5000만 엔(약 7억4000만원)이 있어도 도우미 일을 하는 성실한 사람들이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거든.”

 70년대만 해도 전국 수천 개가 넘었던 나전 공장이 몇 남지 않고 쓰러졌다. 싼 걸 찾는 소비자에게 맞춰 생산자들이 값싼 나무에 싸구려 칠을 해 얼렁뚱땅 만드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지인들이 “한국에서 산 물건인데 부서졌다”고 하면 그는 “조금만 손보면 고칠 수 있다”며 수리해 줬다. 잘못 만든 물건이라고 해버리면 한국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40년 전 만들어 내가 쓰던 가구를 전시했어. 그래도 끄떡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지. 나무를 깎고 칠하고 바르는 걸 몇 번 해서 단단하게 한 뒤 한쪽에 제쳐 두고 3~10년 후 하자가 없을 때 자개를 붙이거든.”

길정본 원장이 자개장 앞에 앉았다. 왕실 안주인의 방에 놓았던 십장생 수를 응용한 궁장. 초록 톤을 살려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작품이다.

 그는 무형문화재가 아니다. 제안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러나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6~7명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혼자 ‘문화재’라는 이름을 얻는 제도는 불합리하다며 거절했다. 디자인은 그가 하지만 작업은 기술자들 몫이다. “옻칠은 일본을 따라갈 수 없지만 나전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야. 내 작품을 세계인이 좋아하게 만들어 한국의 나전을 알리고 기술자를 양성해야지. 세금으로 전시하고 싶진 않아. 국가 탓만 할 게 아니라 국민으로서 자기 일은 책임지고 해내야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면 안 될 일이 없어.”


매년 김장 1000포기 담가 일본으로 보내 … ‘별미’ 무알배기 김치 손수 개발도

길정본 원장은 일본에 김치를 유행시킨 ‘김치 외교’의 선구자다.

 20여 년 전 일본에 초청받아 전시를 할 때였다. 어느 일본 여인이 “이게 무슨 냄새야…. 썩는 내가 나 토할 것 같네”라며 고개를 돌렸다. 길 원장은 참지 않았다.

 “당신! 내 몸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당신들 몸에선 지린내가 나. 돼지에겐 돼지 냄새가 나고 닭에겐 닭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듯 한국 사람한테선 김치 냄새가 나는 거야. 일본이 교양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보니 볼품없군!”

배추김치(사진 위)와 길정본 원장이 손수 개발한 무알배기.
 길 원장은 일본인이 김치에 미치게 만들리라고 결심했다. 우선 그 자신이 김치 없이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냄새가 새지 않도록 김치를 비닐로 6~7겹 싸고 아이스박스에 넣어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러곤 친분을 쌓은 이들에게 선물했다.

 “김치를 먹으면 어떤 병도 나아. 소화도 잘되고 피부도 좋아져. 자기 몸이 제일 중요하니까, 다른 식구 주지 말고 혼자 먹어. 일주일만 먹어봐.”

 처음엔 김치 냄새에 토하던 이들도 조금씩 적응하더니 오래지 않아 중독이 됐다. 첫 15년간은 기관장 등 공무원들에게 김치를 퍼뜨렸다. 길 원장은 “일본 전역의 기관장 중 내 김치를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로는 민간에도 유행시켰다. 이제는 김치를 보내달라는 전화가 수시로 걸려온다.

 보내는 김치 종류는 열 가지가 넘는다. 배추김치는 기본이요 총각김치·깍두기·백김치·동치미·파김치·갓김치·오이김치·물김치 등을 망라한다. 무를 오이소박이처럼 십자로 쪼갠 뒤 낙지·굴·밤·잣·호두·땅콩·마늘·미나리·청각 등 갖은 양념으로 소를 채우는 ‘무알배기’ 등 손수 개발한 김치도 너덧 가지다.

 배추 등 채소류는 직원의 가족들이 농사지은 걸 거둬 정수기 물로 씻어 쓴다. 영광 새우, 거제 멸치를 생으로 사 1년간 삭혀 젓갈과 진액을 만든다. 김장철이면 한꺼번에 1000포기, 오뉴월에도 매주 50여 포기씩 김치를 담가 일본 전역의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사서 보내는 게 더 싸지. 힘도 안 들고. 그런데 한번 시판 김치를 보냈더니 맛이 바뀐 걸 대번 알아채는데 어떡해. 그들이 베푼 은혜를 맛난 음식으로 갚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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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