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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의 여론女論] 1937년 ‘왕따’ 여학생의 자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37년 1월 한 여학생이 학교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맸다. 그녀의 이름은 문창숙. 당시 이화여전 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제주도 출신인 그녀는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근로장학생’으로 기숙사의 금전출납부 회계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맡긴 돈 20원이 없어지면서 문창숙이 이 돈의 횡령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차례 사감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소문은 전교에 퍼졌고,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투서가 학교에 배달됐다. 투서에는 그 돈을 쓴 자가 다른 사람이며 문창숙이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이 투서의 필적이 문창숙의 것과 비슷하다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었다. 결국 그녀는 공금을 횡령했을 뿐 아니라 자기 죄를 모면하기 위해 투서 자작극까지 벌였다는 이중의 누명을 쓰게 되었다. 학교 측은 그녀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이러한 압박감과 억울함을 못 견딘 그녀는 유서를 남긴 뒤 자살했던 것이다. 그 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필적 감정의 최고 권위자를 동원해 검증한 결과 창숙은 실로 결백했다(‘학교의 중압을 사(死)로써 항변한 이전(梨專) 문창숙 양의 자살 사건’, 『조광』, 1937.3).

 당시 사건은 이 여학생의 자살 이유가 결국 누명과 교사들에 의한 모욕감, 그리고 친구들의 따돌림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또한 교사들의 학생지도 방법과 학생의 인권 문제도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전봉관, 『경성 자살클럽』, 살림, 2008).

 이광수는 학교 측이 학생의 인권을 무시한 데에 가장 큰 책임을 물었다. 학교는 문창숙을 추궁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전교생들에게 그 투서의 내용을 각자의 글씨로 써 보게 하는 필적조사를 통해 학생들 모두의 인격을 모독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문창숙의 사(死)는 교육자에 중대한 경종을 울린 것… 우리는 부모적 교육자를 원하거니와 법관적 교육자를 원치 아니한다. 학교는 지식을 매매하는 점포도 아니거니와 경찰관서나 법정이 아니요, 애(愛)와 감화가 있을 곳이다”라고 당부했다(이광수, ‘문창숙 자살사건에 대한 비판’, 『조광』, 1937.3).

 최근에도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한국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다. 그 원인으로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등이 거론되며 당국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피해 학생 관리뿐 아니라 때리고 따돌리는 가해 학생 지도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해야 한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학교는 경찰서도 법정도 아니라는 이광수의 말이다. 폭력, 따돌림 같은 학생들 내부의 병리적 현상은 엄격한 통제나 처벌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과 감화로 그들의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교육의 진짜 역할이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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