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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85> 한국은행의 역사와 기능

개정된 한국은행법이 17일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한은의 목표에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을 추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국은행의 금융회사에 대한 조사권이 강화된다는 뜻이죠. 이에 따라 한은은 시중은행 외에 제2 금융권에도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금은 물론 은행이 발행한 금융채에도 지급준비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됐고요. 한은이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겨났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한은의 역사와 기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선하 기자


한국→조선→한국은행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중앙은행이 처음 생긴 것은 1909년이다. 이름도 지금과 같은 ‘한국은행’이다. 하지만 이 은행은 이름만 ‘한국’이지 실은 일본 은행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우리의 경제 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임원 전원을 일본인으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한국’이란 표현이 금지되면서 1911년엔 이름도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주된 역할은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이었다.

광복 후에는 한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조선은행의 일본인 총재·간부를 쫓아내긴 했지만, 광복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감당이 쉽지 않았다. 일제의 금융법령에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각종 행정명령이 뒤섞여 법·정책의 일관성도 없었다. 조선은행이 화폐 발행과 국고(國庫) 등 중앙은행 역할 외에 예금·대출 같은 일반은행 업무까지 해온 것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새 중앙은행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하지만 설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부는 중앙은행을 정부에 종속시키고 싶어했다. 당시 재정 지출은 조세 수입보다 중앙은행 차입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 생산활동이 워낙 미약해 세금 걷을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중앙은행법 초안은 직원의 신분을 공무원으로 하고, 임원 임면권은 재무부 장관에게 주도록 했다. 화폐 발행 한도도 재무부 장관이 정하게 했다.

조선은행 측은 펄쩍 뛰었다. 이러면 중앙은행이 정부의 현금인출기 노릇을 하게 된다고 맞섰다. 양측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금융전문가 파견을 요청했다. 서울에 온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아서 블룸필드 국제수지과장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주장한 조선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재무부 장관이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기로 하는 등 절충을 거쳐 한국은행법이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진통은 이어졌다. 당시 법제처장은 “금통위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했고,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의원이 “금통위 권한이 대통령보다 더 크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는 결국 재석 102, 찬성 78, 반대 6으로 한은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1950년 6월 12일 ‘진짜’ 한국은행이 출범했다.


계속된 위상·역할 논란

한국은행의 최대 목표인 ‘물가안정’이 새겨져 있는 한은 1층 로비의 모습.
설립 당시 한은에는 크게 여섯 가지 역할이 주어졌다. ▶독점적 화폐 발행 ▶은행의 은행(지급준비금 보관과 최종 대부자 기능) ▶정부의 은행(국고금 예수와 국채 인수) ▶통화신용정책 수립·집행 ▶은행 감독 ▶외국환 관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설립 직후 6·25전쟁이 터지면서 한은의 최대 역할은 전시경제 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엔 상황이 더 나빠졌다. 5·16 이듬해인 62년 개정된 한은법은 한은의 활동 영역을 좁히고, 정부가 끼어들 여지는 대폭 넓혔다. 금융통화위원회의 이름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바꿨고, 위원회의 결정 사항에 대해 재무부 장관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재의 요구가 부결되면 아예 위원회의 결정권을 빼앗아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금통위원의 수는 7명에서 9명으로 늘렸고, 정부 추천 몫은 2명에서 5명으로 확 키웠다. 한마디로 정부 맘대로 하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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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의 위상이 전기를 맞은 것은 97년 6차 한은법 개정이 이뤄지면서다. 금융통화위원회가 이름을 되찾았고, 의장은 재정경제원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뀌었다. 금통위원 수는 7명으로, 정부 추천 몫은 2명으로 원상복귀됐다. 독립성이 다시 커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역할이 쪼그라드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한은의 은행 감독 기능을 통합 감독기구인 금융감독원에 내준 것이다. 한은 직원이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총재실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전직 한은 총재가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법 개정으로 한은 설립 목적은 ‘통화가치 안정과 은행·신용제도 건전화’에서 ‘물가안정’으로 축소됐다. 기준금리 조정과 경제 분석·전망 정도로 역할이 줄어든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은 또 한번 달라졌다. 활동 반경이 좁은 한은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한은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렸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것이 17일 시행된 8차 개정 한은법이다. 이번 개정으로 한은은 은행 외에 자산이 업계 평균 이상인 증권·자산운용·보험·카드사에도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한은이 금융사 공동조사를 요구할 경우 금융감독원은 1개월 안에 응해야 한다. 물론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간 한은이 정부 눈치 보느라 물가안정이라는 주어진 역할도 소신껏 못 해오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다.


최대 목표는 물가 잡기

1997년 6월 한국은행법의 개정에 반대해 한은 직원들이 총회를 여는 모습.
한은 1층 로비에는 ‘물가안정’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은법 1조 1항도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번에 금융안정이란 역할이 더해지긴 했지만 가장 큰 목표는 역시 물가안정이란 얘기다.

한은은 화폐의 발행과 유동성 조절을 담당한다. 돈이 너무 많이 풀리면 경기가 과열돼 물가가 뛰고, 너무 적게 풀리면 경기가 위축되고 실업자가 늘어난다. 금리 조절 등을 통해 이런 현상을 방지하는 것을 통화신용정책이라고 한다. 한은 총재를 비롯한 금통위원 7명(현재 1명은 공석)이 매달 기준금리(한은·금융사 간 거래 금리)를 결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수단이다. 한은은 금융사를 상대로 국채 등을 사고팔아 시중의 자금 사정을 변화시키는 공개시장조작도 한다. 금융사가 예금의 어느 정도 비율을 쌓아두도록 할지를 정함으로써 통화량을 조절하는 지급준비율제도도 있다.

이밖에 금융사 간의 자금 결제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급결제망(BOK-Wire)을 운영하고, 금융사가 일시적으로 자금이 부족할 때 빌려주는 최종 대부자 기능도 한다. 세금 등 정부 수입을 국고금으로 받아놨다가 정부가 필요할 때 내주고, 정부의 국채발행 업무를 대행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지난달 말 기준 3086억 달러)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도 한은의 역할이다. 국내총생산(GDP)·국제수지 등 각종 경제지표와 관련된 통계를 작성·발표하고, 국내외 경제 상황을 조사·연구하는 기능도 맡고 있다.


중앙은행의 역사는 독립과 통제의 반복

17세기 영국은 오랫동안 전쟁을 겪었다. 특히 윌리엄 3세는 내전에 이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곳간이 거의 바닥나게 됐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잉글랜드은행)은 이런 왕실에 돈을 빌려 주기 위해 1694년 세워졌다. 상인을 주주로 모아 120만 파운드를 출자해 은행을 세우고, 그 돈을 전부 왕실에 꿔 줬다. 대신 상인들은 출자액만큼 은행권을 찍어 내 유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채 발행과 비슷한 셈이다. 이 은행은 1844년 독점적 발권은행이 됐고, 1946년 국가 기관화됐다.

 중앙은행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진통을 겪은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은 더했다. 미국에는 현재의 연방준비제도(Fed)가 생기기 전에도 중앙은행 업무를 하는 곳이 있었다. 처음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한 곳은 1791년 만들어진 ‘1차 미 합중국은행’이다. 영란은행을 참고해 만든 이 은행은 일반 은행 업무를 하면서 20년 동안 한시적으로 달러화 발행과 정부의 재정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한 창구 역할을 맡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중앙은행이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하지만 당시엔 당장 위헌론이 나왔다. “어떻게 특정 은행에 ‘정부의 은행’ 역할을 맡기느냐”는 주장이었다. 이 은행은 간신히 설립됐지만 정해진 20년이 지나자 더 이상 중앙은행 역할을 유지하지 못했다. 1816년 다시 설립된 ‘2차 미 합중국은행’도 20년 동안만 중앙은행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엔 아예 중앙은행이 없었다. 1907년 호된 금융 공황을 겪고 나서야 중앙은행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1913년 연준이 만들어졌다.

 중앙은행의 역사는 역할·독립성의 강화와 약화가 교차해 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각국 중앙은행은 대부분 정부 소유이거나 정부의 강한 통제를 받았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찍어 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다. 독일은 1923년, 미국은 35년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60~70년대까지 통화정책을 주도한 것은 여전히 정부였다.

 80년대부터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금융 자율화·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시장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황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중앙은행이 금융시스템 전체의 안정성 유지에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른바 ‘거시 건전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시행된 개정 한은법도 이런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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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