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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수의 희망이야기] 친구가 잘나 보이는 날엔

손병수
논설위원
‘친구들이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이는 날/ 이날은 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하고 노닌다’.

 1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의 짧은 시입니다. 26세에 요절했으나 심금을 울리는 시편을 많이 남겨 일본에선 우리의 김소월만큼이나 사랑받는 시인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표현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작가 최인호의 에세이집 『산중문답』에서 옮겨놓은 시를 인용했습니다. 최인호가 “젊은 시인이 어찌 그런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하며 감탄한 시입니다.

 12월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송년 모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꽤 오랜 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터라 보고 싶은 사람과의 모임이 많네요. 술 한잔 걸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훌륭한 친구가 참 많더군요. 어느 자리든 성공하고, 출세한 친구나 지인들의 얘기가 넘쳐납니다. 연말에 대기업이나 관공서 인사가 집중되다 보니 “누구는 뭐가 됐다더라”는 얘기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자식농사에 성공한 친구 얘기도 술기운을 타고 무슨 전설이나 신화처럼 번져갑니다. 그런 친구들이 많을수록 모임은 왁자지껄입니다. 박수로, 소폭(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으로 축하를 거듭하다 밤이 이슥해지곤 합니다.

 그런 밤의 그늘에 적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송년회가 한 해를 무사히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로 변해가기 때문인가요. 볼 수 없는 친구들의 소식을 물으면 대개 실직이나 사업 실패 같은 사연이 머뭇거리며 다가옵니다. 잘나가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 내년에 다시 이 모임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꾸 술잔을 끌어당깁니다. ‘제비꽃은 결코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고, 진달래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진달래는 진달래꽃답게 피면 됩니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듯, 세상에 쓸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글을 주문처럼 외우면서도 또 한잔 털어넣곤 합니다.

 그럴 무렵이면 이시카와의 시를 다시 읊어봅니다. 오래 병마와 싸우고 있는 최인호는 “아내에게서 평생을 통해 사귄 단 하나의 친구와 같은 우정을 느끼고 있다”면서 이 시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부부 간의 인연을 빗댄 유머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부부는 20대에는 서로 사랑으로 살고, 30대에는 서로 정신 없이 살고, 40대에는 서로 미워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불쌍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감사하며 살다가 70대에 이르러서는 서로 등 긁어주며 산다’. 이대로라면, 저도 ‘서로 불쌍해서 사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험한 세상 살아가는 모든 남편에게 아내는 가장 소중한 친구요 동반자입니다. 12월 중순이니 아직도 연말까지 모임이 많이 남아 있겠지요. 오늘은 까짓것, 송년회 한번 제치고 집으로 직행하면 어떨까요. 꽃 한 송이 사든다면 더욱 좋겠지요. 아내와 노닐기 위해.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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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