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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외규장각 145년 만의 귀환 일등공신 박병선 박사

지난 6월 11일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대회에 참석한 박병선 박사(왼쪽). 오른쪽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를 발견하고 세계에 알린 1970년대 초의 모습. [중앙포토]
“빨리 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자꾸 몸이 아파서 기운이 없어. 큰 상까지 받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두 달 전 그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직후의 통화였다. 재불 학자 박병선 박사가 타계했다. 83세.



83세로 타계한 ‘직지 대모’

 고인은 1972년 『직지』(直指·직지심체요절)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밝혀낸 인물이다. 75년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의 책 보관소에서 고인이 찾아낸 의궤 297권은 지난 4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여’라는 꼬리표가 달렸지만 145년 만의 귀환이었다.



 박 박사는 입원 중이던 파리 15구의 잔 가르니에 병원에서 22일 오후 10시40분(한국시간 23일 오전 6시40분)에 눈을 감았다. 직장암 재발 때문이었다.



 1m50㎝ 남짓의 키에 갸날픈 체구였던 고인은 ‘작은 거인’이었다. 의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75년부터 영면을 맞이하기까지 끊임없이 의궤 반환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약탈 행위가 기록된 문서를 찾아내는 일에도 쉼이 없었다. 그 기록은 그의 책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태학사,2008년)에 들어있다. 그는 지난 8월 재수술을 받기 직전까지 이 책의 후속편을 위한 원고를 썼다. 그리고 조카에게 지금까지 작성된 원고를 모아 책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유언이었다.



 고인은 의궤 297권이 한국의 품에 다시 안겼지만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은 ‘대여’ 형식이라는 것을 끝내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프랑스의) 정권이 바뀌고 일하는 사람들도 바뀌고 하면 (프랑스가 다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국민들이 합심해 소유권을 넘겨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함께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에게 자금을 댄 부잣집의 딸로 태어난 그는 55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로 유학갔다. 부친은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박정근 전 전북지사였다. 그는 60년대 후반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을 때 프랑스로 귀화했다. 고인은 “1967년의 동백림 사건(한국 중앙정보부가 유럽 유학생들을 간첩단으로 조작한 사건) 때문에 파견된 한국 정보부 요원이 귀국을 강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며 늘 동포들에게 미안해했다.



 76년 의궤의 존재를 한국 언론에 알린 것이 빌미가 돼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사서직에서 쫓겨난 고인은 적은 액수의 연금에 의지해 파리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해왔다. 고인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면서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될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만년에는 젊었을 때 취미로 사 모은 동양 골동품을 팔아 자료 조사비로 썼다.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3층에 마련된 그의 연구실 책상에는 소화제·지사제 등의 약과 수퍼마켓에서 파는 과자들이 늘 쌓여있었다. 잼을 바른 비스켓으로 점심을 때우는 모습이 여러번 눈에 띄었다.



 고인은 의궤를 처음 대면한 때가 평생 가장 잊지못할 순간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책을 펼치자 먹향이 코로 가득 들어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국 정부는 고인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심의를 요청했다. 한국 박물관협회는 서울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분향소를 마련했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10시 30분(현지시간) 파리 7구의 외방선교회에서 엄수된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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