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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발가벗고 북풍을 맞아보라

심상복
경제연구소장
논설위원
올해 첫눈은 러시아 극동에서 맞았다. 본사 경제연구소가 지난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러시아 극동연방대학교(FEFU)와 공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극동 비즈니스포럼’을 열었다. 11월 중순 그곳은 황량했다. 자작나무 숲은 앙상한 가지를 서로 포개며 추위를 달랜다. 낮 최고 기온이 영하 3도, 바람은 습기를 머금은 탓에 생각보다 차갑다. 16일 오전 눈보라를 맞으며 루스키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30분쯤 걸렸다. 내년 9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곳이다. 정상들 숙소와 컨벤션센터, 프레스룸 등 대부분의 건물은 이미 외양을 다 갖췄다.

 차디찬 북풍과는 대조적으로 개발 열기는 뜨겁다. 극동지방을 변모시키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예비 대통령’의 의지가 곳곳에서 배어난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굽어볼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 태평양함대사령부와 군함,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극동 관문인 철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내와 루스키 섬을 연결하는 3.1㎞ 연륙교 공사현장도 장관이다. 양쪽에 322m 높이의 주탑을 세우고 그 사이를 잇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저 멀리 골든혼베이를 연결하는 해상 교량공사도 한창이다. 신공항 건설과 기존 공항 현대화, 고속도로 건설, 우스리스크까지 연계 철도, 호텔·병원 신축 등 도시 전체가 공사판이다.

 이 프로젝트의 지휘자가 푸틴 현 총리다. 그는 이미 10여 년 전 보리스 옐친 대통령 밑에서 총리를 지냈다. 옐친이 사임하면서 2000년 3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푸틴이 집권한 7년간 러시아는 국내총생산(GDP)이 4배나 불어났다. 주가지수는 12배 상승했으며 실업률은 5%포인트 떨어졌다. 소련 붕괴로 쇠락하던 러시아를 다시 강국 반열로 끌어올린 것이다. 당시 총리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 푸틴은 그 밑에서 4년간 총리를 지낸 뒤 내년 3월 또 대권에 도전한다. APEC을 계기로 ‘자원의 보고(寶庫)’ 극동을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복안이다.

 시동은 2년 전 극동·자바이칼지역 발전계획을 마련하면서 걸었다. 2013년까지 연해주 지역에 5600억 루블(약 200억 달러, 22조원)을 쏟아붓는 국책사업이다. ‘에너지 전략 2030’도 있다. 석유·가스관, 유화단지 및 액화천연가스(LNG) 공장, 발전소를 새롭게 구축한다는 플랜이다. 이를 위해 2025년까지 극동과 시베리아에 최대 9조 루블(약 350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푸틴의 야심은 이 정도가 아니다. 지난달엔 옛 소련국가들을 모아 ‘유라시아 경제연합(EAU)’을 2015년 전에 창설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우선 내년에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3국이 ‘단일경제공동체(CES)’를 출범하고, 그 뒤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을 끌어들여 EAU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푸틴 구상의 실현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지난 20년간 극동지역 인구는 경기 부진으로 25%나 줄었다. 그 틈새를 중국이 호시탐탐 넘보고 있다. 극동지역은 유라시아와 아시아·태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이다. 푸틴이 ‘강한 러시아’를 위해 공을 들이는 배경이다. 동시에 중국의 부상은 적극 견제한다. 외국인 투자를 갈구하면서도 중국 자본은 몹시 켕겨 하는 이유다. 사회주의 잔재는 아직 깊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는데 바로 내리란다. 버스가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다 왔다고 했다. 불과 30m 거리를 버스에 태운 것이다. 시내 도로는 곳곳이 파이고 깨졌다. 볼셰비키 혁명(1917년) 이후 박힌 인이 하루아침에 빠질 순 없을 게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전진은 계속한다. 지난 10일 이 나라는 세계무역기구(WTO) 회원 가입을 허락받았다. 1993년부터 18년간 끌어온 숙제를 끝낸 것이다. 이로써 G20 회원국 중 WTO에 가입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는 불명예를 씻게 됐다.

 현재 러시아 경제 수준은 한국에 비해 몇 수 아래지만 그들의 GDP 규모는 이미 우리를 앞질렀다. 약 1조5000억 달러로 세계 11위다. 한국 GDP는 1조 달러를 조금 웃도는 15위다. 기초과학 강국인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과 에너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미래를 생각할수록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그들이 푸틴을 앞세워 옛 소련의 영광을 다시 꿈꾼다. 서울에선 한·미 FTA라는 다 된 밥을 엎어버리지 못해 안달하는 세력들이 여전하다. 그들의 머릿속에 국력이나 국익 따위는 없다. 북풍한설(北風寒雪) 시베리아 벌판에 발가벗겨 세워두면 정신 좀 차릴까.

심상복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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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