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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 폭로 관련자 유대인 일색...아랍선 유대인 음모설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 지퍼게이트’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라틴 문화권에선 정치인 등 공인의 여성 스캔들에 대해 관대하다.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사생활 영역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일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위협받지 않는다. 반면 미국·영국 등 앵글로색슨 국가에서 공인의 스캔들은 치명적이다. 1963년 콜걸 크리스틴 킬러와의 추문으로 사임한 존 프로퓨머 영국 국방장관, 87년 모델 도나 라이스와의 불륜으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서 낙마한 게리 하트, 콜걸과의 추문으로 2008년 뉴욕 주지사 직에서 사임한 엘리엇 스피처 등 사례가 많다. 98년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미국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넣은 ‘모니카 게이트’가 터졌다. 한 백악관 인턴 여성의 말 한마디로 빌 클린턴 대통령은 탄핵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유대인 여성 모니카 르윈스키가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백악관 집무실서 아홉 차례나 성적 유희

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모니카의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다. 종양 전문의인 아버지는 독일계, 작가인 어머니는 리투아니아-루마니아계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 로스앤젤레스에서 유대계 초등학교를 다녔다. 부모와 함께 시나고그에도 열심히 나갔다. 15세가 되던 해인 88년 부모의 이혼으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옮겨 그곳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워싱턴DC에 사는 인척의 주선으로 백악관에 무급 인턴 자리를 얻었다. 95년엔 백악관 법률 부서의 정규직 인턴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연한 기회에 클린턴을 처음 만난 모니카는 대통령을 사모했다. 클린턴은 95년부터 2년간 그녀를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 아홉 차례나 끌어들여 성적 유희를 벌였다. 대통령의 부적절한 처신의 파장을 우려한 보좌진은 그녀를 국방부로 보내 격리시켰다. 모니카는 국방부에서 만난 직장 선배 린다 트립에게 대통령과 자신의 관계를 재미 삼아 털어놓았다. 트립은 이를 녹음해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에게 준다. 스타는 리버럴한 클린턴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개신교 원리주의자 성향의 인물로 이 건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르윈스키 스캔들은 98년 1월 최초로 언론에 보도됐다. 처음 클린턴은 완전히 잡아뗐다. 모처럼 센세이셔널한 대형 호재를 만난 미국 언론은 신바람이 났다. 황색매체는 물론 정론지를 자처한 유력 매체 모두가 독자의 ‘알 권리’를 빙자해 연일 지저분한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미국 TV 방송의 간판 앵커들도 교황의 역사적인 쿠바 방문(98.1.22~25) 보도에 투입되었다가 급거 귀국해 이 사건에 매달렸다.



미국 대통령의 체신이 말이 아니었다. 클린턴은 모니카의 푸른 드레스에 묻은 그의 체액 감정 DNA 검사에 응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검사 결과 클린턴의 행적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는 더욱 궁지로 몰렸다. 결국 이 사건은 의회로 비화돼 미국 하원은 98년 12월 19일 위증과 사법방해 혐의로 발의된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반면 상원은 99년 2월 12일 이 안을 부결시켜 클린턴은 겨우 대통령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모니카는 99년 3월 원로 유대인 여성 앵커 바버라 월터스가 진행하는 ABC-TV의 ‘20/20’ 뉴스쇼 프로에 나가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이어 그녀의 증언을 담은'모니카의 이야기'도 출간됐다. 심한 우울증으로 폭식하던 모니카는 한때 몸무게가 110㎏이나 나가는 뚱보가 되기도 했다. 이후 핸드백 디자인 등 패션 사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2006년엔 런던정경대(LSE)에서 사회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엔 뉴욕에서 홍보업체를 만들어 활동한다고 한다.



모니카 게이트는 당시 아랍 세계의 큰 관심사였다. 아랍권 언론은 이 사건을 미국 유대 로비의 음모로 추리했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당선과 재선 과정에서 미국 유대사회의 지원을 많이 받은 클린턴은 재선 임기 중 세계 대통령으로서의 획기적 업적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는 중동 평화회담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95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를 발족시킨 오슬로 협정, 그리고 98년 이스라엘군의 요단강 서안 철수를 규정한 와이 합의(Wye Accord)를 이끌어냈다. 그러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 협정의 이행을 수차 강력하게 촉구했다.



유대계 언론인이 스캔들 확산시켜

이스라엘과 미국 유대사회는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중동 평화중재를 싫어했다. 이스라엘의 양보가 항상 전제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린턴에게 섭섭한 감정을 가진 미국 유대 로비가 클린턴을 견제하고 네타냐후를 지원하기 위해 이 스캔들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 다수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인 모니카에게 클린턴과의 관계를 밝히도록 사주했다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 백악관 직원 루시안 골드버그가 유대인이다. 이 사건을 심층 취재하고 최초로 보도한 뉴스위크 기자 마이클 이시코프, 그리고 이 스캔들을 확산시킨 인터넷 매체 드러지 리포트의 사주 매트 드러지와 자유기고가 조나 골드버그도 유대인이다. 모니카의 변호인 윌리엄 진스버그도 유대인이다.



‘지퍼 게이트’로 곤욕을 치른 클린턴은 중동 평화노력을 계속할 동력을 잃었다. 그는 퇴임 시까지 중동문제 합의 이행을 더 이상 이스라엘에 강요하지 않았다. 아랍권이 주장한 음모론의 진위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사건의 정황과 관련 인물, 그리고 결과만 놓고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은 셈이다.



박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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