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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김 테레사 … 자신의 장르 한정 짓지 말라는 자유로운 예술가

김 테레사라는 예술가가 있다. 올해 작품집을 두 권 냈다. 하나는 며칠 전에 나온 사진집이고, 다른 하나는 연초에 발간된 화집이다.



“내 마음대로 찍고 그리지, 왜 눈치 봐 ”

『워싱턴 스퀘어 그때 그리고 그 후 1973-2010』 『1978-2010』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테레사는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이다. 그런데 왜 유작집(遺作集) 같은 제목의 작품집이 나오게 됐을까. 작품집은 미술, 사진 관련 출판으로 유명한 ‘열화당’에서 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작품집이 나온 배경에는 한국 사진계의 양대 거목인 강운구, 주명덕 선생이 있다. 두 사람이 14년의 시차를 두고 열화당에 어떤 작가의 화집 출간을 권유했는데 그게 김 테레사였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스스로 쓴 사진집 머리말에서 ‘매우 별난 일’이라고 회고했다. 김 테레사를 11일 인터뷰했다. 김 테레사는 외과의사를 하는 남편 김승원(71)씨와 미국 뉴욕에 살고 있다. 때마침 서울 청담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때문에 귀국해 있던 차였다. 테레사는 어릴 때부터 그녀 부모가 부르던 이름이다.



유작집 같은 작품집



●작품집 제목이 마치 유작집 같습니다.




 “내가 1년 반 전에 한국에서 크게 다쳤어. 진달래색 블라우스를 입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직장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 그 냄새가 내 왼쪽 콧구멍에 들어온 순간 대리석 바닥에 쓰러진 거야. 해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응급차로 실려가서 한참 고생을 했지. 한동안은 도저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뭔가 정리를 깨끗하게 하고 가야겠다, 내가 살아 있을 적에 작품집을 만들 준비를 해야겠다 싶었어.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연초에 화집을 내고, 며칠 전에 사진집이 나온 거야.”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책 만드는 동안은 그래도 내가 살아 있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 하늘이 사람을 살리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지?”



●사진과 그림을 동시에 한 작가는 많지 않죠.



 "모든 예술이 사실은 하나라고. 피카소가 일생 그림만 그렸나. 조각도 하고, 공예도 하고 별난 짓거리를 다 했잖아. 그런데 한국에선 예술가한테 장르를 나눠서 한정 지으려고 해. 그럼 예술가의 창의력이 없어져. 아니, 밥을 할 수 있으면 떡도 하고, 죽도 끓일 수 있는 거잖아.”



 테레사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사진작가로서 국내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72년에 남편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뉴욕 워싱턴 스퀘어를 30년 넘게 뷰파인더에 담았다. 그러던 차에 70년대 후반 화가로 변신했다. 이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꾸준히 회화전을 열어왔다.

김 테레사의 작품들. 왼쪽부터 동아사진콘테스트 대상작인 ?허심(1969년)?과 ?대화(1970년)? 그리고 말을 그린 회화.


●진짜 예술이 좋아서 예술을 하시나 봅니다.



 "그럼. 나는 누굴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야. 내가 행복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그리면 순수한 작품이 아니라니까.”



●그런 자유와 열정은 어디에서 얻은 겁니까.



 "타고나는 거야. 이 사람 눈치 보고 저 사람 눈치 보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 한국에선 나이를 따지는데 그러니까 조로하는 거야.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야. 나는 사진도 내 마음대로 찍고, 그림도 내 마음대로 그리고, 옷도 내 마음대로 입어. 내 입맛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야.”



●그런 행복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로선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축복이라고 하잖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예술



 테레사는 ‘어떤’ 대신에 ‘어드런’이라는 이북 사투리를 쓴다. 해방 직후, 그리고 6·25전쟁이 나기 전 철원에서 살았다. 철원은 38선 이북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이 또래에겐 누구나 전쟁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테레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음악과 사진, 시를 사랑하는 건축가였다. 당시 귀하던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공산당엔 ‘부르주아 중 부르주아’였나 보다.



 "하나님이 마지막 모습을 보게 했나 봐. 앞뒤로 총을 멘 사람이 하나씩 서고, 중간에 일곱 사람이 묶인 채 끌려가는데 우리 아빠가 거기 있었어. 내가 ‘아빠’ ‘아빠’ 하고 목이 터져라 불렀지. 그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야.”



 전란를 피해 테레사 모녀 단둘이 길을 나섰다. 테레사는 무남독녀였다. 그리고 전주역에서 피란 열차를 내렸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우리 엄마가 참 묘한 분이야. 생활력이 참 강하셨어. 은행장이 살던 빨간 벽돌집 앞에 판잣집을 지으셨어. 은행장 집에서 쌀과 물을 얻어 썼지. 전쟁 중이다 보니 우리 집 앞으로 국군이 많이 다녔는데, 나를 매일 거기다 앉혀 놓고 지나가는 군인들한테 물을 떠먹이게 하셨어. 그래서 군인들이 나를 예뻐했지.”



 아버지가 예술을 가르쳐줬다면, 어머니는 테레사에게 인생을 알려줬다. 당시 어머니는 피란민 수용소에서 모녀 몫으로 배급 식량을 얻어왔다. 그중 일부를 남겨 전주의 거지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덕에 테레사가 전주에서 여고를 마칠 때까지 직접 책가방을 들지 않았다. 거지들이 그녀보다 앞서 책가방을 들었다.



 어머니가 비단가게를 하면서 생활이 안정됐다. 테레사는 숙명여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연세대 의대를 다니던 남편 김승원씨를 만난 것도 그때다. 남편은 사진작가 주명덕과 서울고 동기였다. 고교 시절부터 남편과 주명덕은 암벽 등반과 사진이라는 취미를 함께했다. 김승원과 주명덕은 당시 숙대 사진동아리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편은 자연스럽게 테레사를 사진의 길로 이끌었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 테레사는 사진에서 두각을 보였다.



 "우리 남편이 카메라를 하나 빌려줬어.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기절을 할 정도로 놀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스타가 됐다니까. 한국에서 컬러 사진전을 한 것도 내가 거의 처음이야. 테마전을 한 것도 내가 처음이고. 비원이 일반에 개방되지 않았을 때 내가 비원을 소재로 전시회를 열었어. 그때는 영화 보러 가면 애국가 나오고 그 다음에 ‘대한뉴스’가 나왔잖아. 거기에 내 전시회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니까.”



 테레사의 시아버지는 미국 유학파였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부부가 함께 72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뉴욕에 정착한 테레사는 워싱턴 스퀘어에 매료됐다. 70년대 초반 워싱턴 스퀘어는 ‘자유로운 예술’의 산실이었다.



 "외국에서 온 음악가들, 그냥 별난 사람들이 다 거기 와서 노는 거야. 피아노를 끌고 와서 광장에서 치는 놈이 있지 않나. 진짜 자유가 거기 있더라고. 그때부터 나도 거기 일원이 됐지. 조그만 동양 애가 와가지고는 사진을 찍으니까 거기 오는 애들이 나를 다 알아보지. 거기에서 음악 공연하는 애들은 저희들끼리 ‘테레사가 아직 안 왔다. 좀 있다가 리허설하자’ 서로들 그랬다잖아. 그렇게 도와주니까 내 사진이 나온 거지.”



 테레사는 75년 잠시 귀국해 당시 미도파백화점에서 ‘워싱턴 스퀘어’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때 미도파에서 전람회를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어. 방방곡곡에서 전람회를 구경하러 왔다니까.”



 남편은 미국의 수련의 생활 때문에 전시회를 와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진작가 강운구가 전시회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미국의 남편에게 보내줬다. 김승원, 주명덕, 강운구, 김 테레사 등으로 맺어진 교분은 매우 두터웠다. 이런 인연 덕에 테레사의 사진들이 전시회를 하고도 30년이 넘어선 최근에 사진집으로 나온 것이다. 사진집 제목은 『워싱턴 스퀘어, 그때 그리고 그 후』다. 사진집에는 9·11 테러 이후의 워싱턴 스퀘어가 담겨 있다. 흑백, 컬러, 폴라로이드, 디지털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역사가 오롯이 담겼다. 1973부터 2010년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담았으니까.



 이에 앞서 연초에 발간된 화집에는 테레사가 도미 이후 30년 넘게 그린 유화, 수채화가 담겨 있다. 테레사는 79년 이후 2, 3년 간격으로 꾸준히 전시회를 열어왔다. 테레사의 그림에는 말과 피에로가 많이 들어 있다.



●왜 말을 그리게 됐죠.



 “내가 대학 1학년 때부터 뚝섬승마장에서 말을 탔거든. 남들이 그렇게 못 하던 그 시기에 나는 모든 경험을 한 거야. 말이 얼마나 잘생겼어. 그리고 말을 타면 체온이라는 게 느껴지잖아. 인간은 배반을 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돼. 그런데 말은 달라.”



●그렇다면 피에로는 뭐예요.



 “나 어렸을 적에 한국에 곡마단이 많았잖아. 미국 가니까 거기에도 3대를 내려온 곡마단이 있어. 피카소도 피에로를 많이 그렸어. 좋은 세상에서 그런 것을 만났으니 스케치를 해서 그림을 그려야지.”



●테레사와 피에로의 닮은 점이 있나요.



 “피에로는 관중에게 웃음을 줘야 하지만, 내면에 슬픔이 많아. 그런데 나는 바깥과 내면이 같아. 그게 다르지. 아, 나도 허탈할 때가 있긴 하네. 전람회를 끝내면 굉장히 쓸쓸하거든.”



 전시회 기준으로 보자면 테레사에게 살짝 공백기가 있다. 98년부터 2005년까지다.



 “한국이라는 곳이 참 치사해. 짝퉁이 판치는 곳이야. 여성 큐레이터, 누구였더라. 그 친구랑 어쩌고 저쩌고 한 놈들이 매스컴을 타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에 발을 들여. 내가 매스컴에 안 나오니까, 사람들이 ‘공백기’라고 하는데, 웃기는 얘기야. 나는 계속 작품을 그렸어. 그런데 내가 내 작품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거야. 내 그림이 수백 장이라니까. 대한민국 작가 중에 나만큼 스톡(stock)이 많은 사람이 없어.”



 테레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분명하게 말했다.



 “짝퉁이 나와서 사기를 쳐도 나중에 보면 가짜인 게 드러나잖아. 결국 진실은 하늘이 내리는 거야. 가짜는 들통이 나게 돼 있는 거라고. 그래서 공백기 운운이 나는 싫은 거야. 작가한테는 공백이라는 게 없어. 24시간 작품을 구상하는 게 작간데 어떻게 공백이 있어.”



●하지만 사람이 살려면 돈도 벌어야죠.



 “그렇지. 하지만 작가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해야 해. ‘내가 무슨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 사진을 찍으면 잘 팔릴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그건 생활인이지 아티스트가 아니란 얘기야. 내가 진정한 작가라면 내가 원하는 작품을 찍고 그리면 되는 거지. 내가 뭔가를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멋쟁이 테레사 … “예술가는 자신부터 가꿔야죠 ”



테레사는 패셔니스타다. 인터뷰 당일에도 화사한 모자를 쓰고 나왔다.



 “내가 한국에서 백화점에 가면 아줌마들이 ‘무비 스타가 나타났다’고 그래. 내가 아니라고 그래도 사인해 달라는 거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화가인 줄 알았는데 영화배우 같습니다’고들 해. 그래서 내가 ‘화가는 어떤데?’ 하고 물으면 ‘베레모 쓰고 청바지 입고 좀 구질구질하잖아요.’ 한다고. 그런데 말이야, 아티스트가 뭐야? 뷰티(beauty)를 창조하는 사람들 아냐. 자기가 자기를 가꾸지 못하는데 어떻게 뷰티가 나올 수 있느냐고? 거울에 비친 내가 아름답지 못한데, 어떻게 내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어.”



 인터뷰 당일 청담아트센터에서 테레사를 만났다. 그녀의 수채화전이 이달 말까지 열리는 곳이다. 테레사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외국인이 많이 오는 행사를 다녀왔다고 했다. 자택에 도착해서 테레사는 또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나가는 모임에선 항상 기대를 한대. 오늘은 테레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어떤 옷을 입고, 무슨 모자를 쓰고, 어떤 메이크업을 하고 나타날까를 궁금해한다는 거야. 그러니 그 기대를 내가 어떻게 저버리겠어. 낙천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인생이 그렇게 되잖아. 나이 마흔부터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고 하잖아. 진짜 맞는 얘기야.”



 처음엔 다소 과장돼 보였는데, 찬찬히 설명을 들으니 테레사의 패션 철학이 이해가 됐다. 그런데도 주차장에서 테레사의 차를 보고 또 놀랐다. 빨간색 스포츠카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잖아.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라니까.”





j 칵테일 >> 최승희에게 2년간 발레 배워



김 테레사가 처음 배운 예술은 발레다. 다섯 살부터 2년간 무용가 최승희에게 배웠다. 6·25전쟁 직전이다.



 "그 양반이 최고 전성기일 때였지. 욕심이 많으니까, 이북에서 도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자들을 뽑아 가르쳤어. 조금 잘한다 싶으면 러시아로 보냈지. 6·25전쟁이 안 났으면 나도 계속 발레를 하고 아마도 볼쇼이로 갔겠지?”



 강원도에서도 남녀 어린이 한 명씩 뽑았는데, 테레사가 최승희의 눈에 들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테레사에게 깊이 각인됐나 보다. 전쟁 중에도 피란지에서 테레사가 발레를 너무 많이 해서 모친이 발레 슈즈를 감출 정도였다. 테레사의 거실에는 발레리나의 발을 본뜬 석고상이 놓여 있다. 발레 슈즈가 곱게 신겨진 채.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이 선물한 거야. 내가 어렸을 적 발레를 한 것을 아는 거지. 내가 발레 그림도 많이 그렸어. 사실 나한테는 그림 전체가 하나의 춤이야. 피에로가 됐든, 말이 됐든 그림을 그려 넣는 공간이 무대인 셈이지. 그러니까 나는 영원히 춤을 추고 있는 거야.”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1년 반 전에 크게 다쳤다고 했잖아. 그때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깨어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오른손을 테스트해 본 거야. 붓은 잡을 수 있겠더라고. 그러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잖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든 없든 간에 내가 붓을 잡아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되는 거야. 나는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돼. 그림을 그리다가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면 제일 행복한 거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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