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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망언 반박,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 무력화…모두가 북진통일 외칠 때 평화통일 기초 닦았다

1972년 중앙일보 창간 7주년을 맞아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오른쪽)이 유민 홍진기 회장( 왼쪽), 손자 이재용(가운데 어린이)과 함께 윤전기를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독서상우(讀書尙友). 책을 읽어 성현들과 벗한다는 뜻이다. 1975년 10월 30일 사내 중앙도서관을 위해 당시 중앙일보·동양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던 유민(維民·오로지 백성만을 생각함) 홍진기(洪璡基)가 쓴 친필 휘호다. 유민은 도서관을 사장실 옆에 두게 했을 정도로 책을 사랑하고, 책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그의 독서열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동양방송 제작진들에게 전염돼 ‘읽는 자만이 발전하고, 공부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절박한 공감대가 오늘까지 중앙일보와 JTBC에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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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 학생들은 등반으로 심신을 단련했다. 1930년대 산에서 밥짓는 유민(왼쪽).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미국은 대일강화조약 초안을 발표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약이었다. 초안에는 한·일 관계 조항이 단 한 줄도 없었다. 패전 후 일본인이 한국에 남기고 간 동산·부동산·사업체 등 ‘적산(敵産)’은 당시 국내 총자산의 80%나 됐다. 적산 처리, 재일교포, 어업 문제 등 한·일간 현안이 미·일강화조약에 포함되지 않으면 큰 후환이 될 게 뻔했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 유일하게 법무부 법무국장이던 유민 홍진기가 나섰다. 김준연 법무장관에게 건의해 이승만 대통령에
해방 뒤 유민(맨 왼쪽)은 법무부 법제관으로 건국사업의 기초가 될 법전 편찬에 몰두했다.
게 상황을 알리게 했다. 이승만은 건의를 외면했다. 홍진기는 포기하지 않고 초대 법제처장 유진오를 찾아갔다. 심각성을 깨달은 유진오가 장면 국무총리 등을 설득해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미국은 귀속재산 소유권 등 한국의 권리를 인정한 조항을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조약에 포함시켰다. “초창기 외교의 값진 큰 수확”(김동조 전 외무장관)이었다.

 유민 홍진기의 삶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뉜다. 전반기는 신생 대한민국 건설(nation building)에 매진한 시기였다. 특히 대일외교에서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
1954년 제네바 평화회담 한국 대표로 참여한 유민(앞에서 셋째)과 변영태 외무부 장관(첫째).
다. 후반기는 언론사 최고경영자이자 대기업 2인자로서의 삶이었다. 전반기·후반기 사이에 4·19와 5·16이 놓여있다.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골이 깊은 시기였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인 이유다.

 유민은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하왕십리(현 서울 왕십리1동)에서 태어났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했지만 본인은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법대는 절대 안 갔지”라고 술회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40년)하고도 교수가 되고자 모교에 남았다. 공산당 사건이 일어나 조선인 조수(조교수 아래 직위) 전원이 대학에서 쫓겨난 탓에 판사의 길로 방향을 튼다.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언론 발전의 공로로 유민을 포상하고 있다.
 ‘항상 공부하고 준비하는 삶’은 해방된 조국에서 빛을 발했다. 미 군정청 시절, 곧 태어날 대한민국의 법전 편찬 작업에 뛰어들었다. 정부 수립(48년) 직후엔 일본과의 국익을 건 ‘외교 전쟁’을 예감하고 일본에 요구할 식민지 피해 배상 목록(배상청구조서) 작성을 건의해 성사시켰다. 부동산·문화재, 인적 손실, 강제공출 피해 등 총 3권의 청구조서는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지렛대 역할을 했다. 완성 직후 6·25 전쟁이 터졌기에 미리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근거자료 부족으로 일본의 주장에 휘둘릴 수도 있었다.

1971년 독일 최대의 미디어그룹인 악셀 슈프링거를 방문해 슈프링거 사주와 담소하고 있는 유민(왼쪽).
 한·일회담 대표로 활약한 유민은 1953년 3차 회담에서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의 ‘구보타 망언’을 통렬하게 반박한다. 구보타는 “식민지지배 시절 유익한 일을 했으므로 일본에도 청구권이 있다”는 궤변을 폈다. 유민은 "전통 국제법에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의 권리가 추가돼야 한다”는 ‘해방의 논리’로 반박했다. 일본은 결국 구보타 발언을 취소하고 역(逆)청구권 주장도 접었다. 유민은 ‘북진통일’ 주장이 대세이던 1954년 ‘평화통일’ 원칙을 최초로 기초한 공적도 남겼다. 그의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은 54년 5월 제네바 평화회담에 제출됐다. 법무부차관 시절 독도에 접안시설·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를 게양하자고 건의해 관철시킨 일을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다.

1970년대 중앙일보를 찾은 ‘워싱턴 포스트’ 캐서린 그레이엄 사장을 맞아 환담하는 유민(왼쪽).
 1960년 3·15 부정선거 8일 후 내무부장관으로 발령받은 유민은 인생 최대 시련기에 접어든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 금지를 지시했지만 정치적 책임마저 면하기는 어려웠다. 5·16 혁명재판 1심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김정렬(전 국무총리·국방부장관)의 선처 요청을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전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평전은 기록하고 있다. 수감 중에도 유민은 산스크리트어 문법까지 공부하는 등 독서 에 열중했다. 1963년 말 석방된 유민을 당대의 거목(巨木) 호암 이병철이 찾았다. 후반기 인생의 시작이었다. 동양방송(TBC)·중앙일보 최고경영자이면서 삼성그룹의 굵직한 사업에도 간여하는 언론인·경영인의 삶이었다.
1983년 11월 방한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를 맞이한 호암(맨 왼쪽)과 유민(맨 오른쪽).
피땀 흘려 일군 TBC가 1980년 군부독재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공중분해된 사태는 그의 마지막 시련이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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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