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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75만 마리 나비 채집 … 전쟁 때도 피난 안 가고 표본 지켜

석주명(石宙明·사진)의 별명은 나비박사다. 42세 짧은 생애에 75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고, 관련 논문 128편을 썼다. 한국 나비의 분류학을 정립하고, 분포도를 작성했다. 한국산 나비 이름도 대부분 그가 지었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나비박사 석주명

그는 1908년 11월 13일 평양에서 출생, 26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29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박물과(생물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을 앞두고 스승 오카지마 긴지 교수의 권유로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29년 귀국해 함흥 영생고보 박물교사로 있다가, 31년 모교인 송도고보로 옮겼다. 23살 때다. 이병철의 석주명 평전에 따르면 이 학교의 시설은 당시 최고였다. 미국 에머리 대학 캔들러 총장의 자금 지원으로 1906년 설립된 학교가 송도고보다. 교정이 와세다 대학보다 크고, 화강암으로 지은 교사와 스팀 난방, 계단식 강의실과 실험실습 설비를 갖춘 이화학관, 1000석 넘는 좌석을 갖춘 2층 대강당, 실내 체육관과 16면의 테니스코트 같은 시설이 있었다. 특히 지하1층, 지상2층의 박물관은 조선 제일의 표본실과 실험실·연구실·저장실·교실들이 있었다.

송도고보에서 석주명은 11년간 나비 연구에 몰입했다. 틈만 나면 전국을 훑으며 나비를 채집했다. 여름방학에는 학생들에게 ‘나비 200마리 채집’을 과제로 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전국 나비 표본을 들고 왔다. 이 기간에 발표한 나비 논문이 79편이었다.

같은 종인데 날개 길이와 무늬, 빛깔, 띠 등의 형질이 조금씩 다른 것을 개체변이, 같은 종을 전혀 다른 종으로 잘못 분류된 학명을 붙인 것을 동종이명(同種異名)이라고 한다. 석주명은 측정 시료 수를 많이 살피면 분포 곡선이 평균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종 모양이 되는 정규분포 곡선을 이용해 동종이명을 증명했다. 종 모양의 정규분포 곡선이 하나가 나오면 그 시료들은 모두 같은 종이다. 그러나 정규분포 곡선이 두 개가 나오면 2종이 섞여 있는 것이다. 요즘은 흔한 방식이었지만 당시 이렇게 통계학적 지식을 생물분류학에 적용하는 ‘변이곡선 이론’은 완전히 참신한 생각이었다.

그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고 했다. ‘조선산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 논문 3편을 쓰기 위해 그는 제1보(36년)에서는 2만1066마리, 제2보(37년)에서는 4만6918마리, 제3보(42년)에서는 9만9863마리, 총 16만7847마리 배추흰나비의 앞날개 길이를 일일이 쟀다. 이렇게 해서 921개 동종이명 가운데 844개를 없앴다. 그리고 한국 나비를 246종으로 분류했다. 현재 밝혀진 한국의 나비가 251종이니까 엄청나게 정확한 분류였다.

1938년 송도학교 교장 신도애(L. H. Snyder) 박사의 주선으로 영국 왕립아시아학회가 석주명에게 조선산 나비 총목록의 집필을 의뢰했다. 그는 학교를 4개월 쉬면서 동경제대 동물학회 도서관에서 조선산 나비에 관한 책 300여 권과 논문 193편을 뒤지고, 많은 학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39년 3월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완성했다. 40년 출간된 이 책은 당시 조선산 나비로 분류된 255종 종류마다 연구사와 학명 변천을 밝히고, 그동안의 동종이명을 총정리한 430쪽짜리 영문 국판이다.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당시 30여 명뿐인 세계나비학회 회원이 되었다.

분류학을 일단락 짓고 그는 한국산 나비의 분포 연구에 나섰다. 1942년 나비 채집과 분포 연구를 위해 학교를 사직했다. 그는 나비를 하도 많이 만져서 날아가는 나비의 암수를 바로 알 정도였다. 연구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면 박물관이 오히려 해충번식장이 될까봐 박물관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태워버린 나비 표본이 60만 마리였다.

그는 나비 250여 종의 분포도를 종류별로 각각 한국지도와 세계지도 한 장씩에 그렸다. 모두 500장의 나비 분포 지도를 배낭에 넣고 다녔다. 이것은 1973년 한국산 접류 분포도로 발간됐다. 42년 그는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촉탁으로 들어갔다가, 제주도의 나비를 연구하기 위해 43년부터 2년간 제주도 시험장에 자원해서 근무했다. 거기서 나비뿐 아니라 제주도 방언과 문화도 연구했다. 제주 관련 논문도 6편을 썼다.

46년 그는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과학관의 동물학 연구부장으로 나비 연구에 몰두했다. 47년에는 그가 만들거나 정리한 한국산 나비 이름 248종이 조선생물학회에서 확정됐다. 그는 6·25 중에도 피란 가지 않았다. 15만 마리가 넘는 나비 표본과 자료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관이 폭격 맞아 모두 소실됐다. 그리고 50년 10월 6일 오후. 과학관 회의에 가려고 뛰어가다 충무로 근처에서 술 취한 청년을 발로 건드렸는데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인민군”이라고 소리치며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42살 과학자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제자들이 현장에서 전해들은 바로는 살해되기 직전 그는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외쳤다. 2008년 그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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